퀵바


감상

추천에 관련된 감상을 쓰는 곳입니다.



작성자
Lv.12 드니드니
작성
11.11.15 23:59
조회
7,671

작가명 : 좌백

작품명 : 비적유성탄

출판사 :

한 편의 시와도 같아

가슴을 진하게 울려오는군요

몇 년 전 읽고 북받치는 느낌에

개인 블로그에 올려두었지요.

가슴을 무딘 칼로 베어내는 느낌...

가족을 보내본 사람이면 느끼실

그 막막함과 어쩔 수 없는 황량함...

그 메일 듯한 느낌..

시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문단을 자르다 보니

본래의 느낌을 훼손한 감이 있어 죄송스럽습니다...

구무협과 신무협의 연결고리로서

위대한 한 획을 그으신 좌백님의 책을

일독하시기 권합니다.

---------------------------

아침에 제비가 낮게 날더니

황혼이 질 무렵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흘 전부터 태워온 장작더미는

비가 내리기 전에 이미 꺼져서 연기만 피어올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그 연기마저 걷어주었다.

그는 새하얗게 타버린 잿더미를 뒤져서

몇 조각의 골편을 골라냈다.

삼년간 같이 살아온 아내이자 친구,

그의 또 다른 한쪽이 되었던 여인의 마지막 잔해였다.

그녀의 이름은 제비라는 뜻의 연(燕)자를 썼다.

이름처럼 제비같이 날래고, 웃음이 많은,

나이가 들어서도 소녀처럼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여인이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다 죽기 직전에는

진짜 제비 한 마리만큼의 무게로 시들어가면서도 농담을 했다.

“새……

새 장가 가면…….”

그는 작은 해골처럼 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에 귀를 가져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자기가 죽으면 새 장가를 가서 대를 이으라는 것인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녀가 말했다.

“원망할 거야.”

연은, 제비는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 표정 그대로, 마지막 웃음을 그에게 보여주고 그녀는 죽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제비와 함께 살아온 지난 사 년 간은

끊임없는 죽음의 연습과도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어떤 약도, 어떤 기도도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죽음이었다.

아홉 명을 죽이고, 한 명을 백치로 만들며 번 돈으로

그는 약을 사고,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살인을 해서 번 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는 차라리 한숨을 돌린 듯한 기분이 되어

시체 옆에 앉아 있다가 준비해둔 수의를 입히고,

준비해둔 장작에 얹어 불을 질렀다.

탈 것도 많지 않겠지만 사흘 동안 불을 지폈다.

남기는 것 없이 깨끗이 수습해서 떠나도록

그렇게 오랫동안 태웠다.

그래도 남은 뼈 몇 조각,

미련처럼 남은 회색 뼈 몇 조각을 그는 항아리에 담았다.

그리고 그걸 앞에 두고 술을 마셨다.

가을의 차가운 비가 머리를, 어깨를 두들겼다.

몇 년간 그는 제비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물론 그러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긴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그건 행복한 괴로움이었다.

내키지 않는 살인도 해야했지만,

그녀의 목숨은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의 목숨을 합친 것만큼 귀중했다.

게다가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은 무림인이고,

무림인이란 목숨을 담보로 부와 명예를 얻는 자들이 아닌가.

마지막 중은 아닌 것 같아서 겨냥이 흔들려버렸지만.

그는 그가 죽인 자들과, 죽이지 못한 자에 대해서,

자신이 비적 유성탄이란 이름으로 한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다.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공을 들인 것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십대라는 중요한 시절에 사년이라는 세월을 바친 모든 것이

지금 한 줌의 재로 스러져 버렸음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허탈할 뿐이었다.

그는 평상처럼 넓적한 바위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비가 얼굴을 때렸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하고싶은 일도, 해야할 일도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의 삶과 생각은

전적으로 제비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갑자기 삶과 시간을 돌려받은 지금 그의 기분은

오솔길을 벗어나 길 없는 광야에 나선 것과 비슷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가고싶은 곳도, 가야할 곳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하고싶은 일도, 해야할 일도 없었다.

그는 팔을 괴고 누워 술잔에 술을 따랐다.

빗물이 술과 함께 잔을 채웠다.

술잔 속에는 끊임없이 빗방울이 떨어져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오랜 시간 그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술잔도, 술병도, 뼛조각을 담은 항아리도 빗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그는 문득 항아리를 당겨 빗물 속에 잠긴 뼛조각을 꺼내었다.

뼛조각은 돌처럼 단단했지만 그의 손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뼛조각을 양손바닥으로 비벼 으스러뜨리고

그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다.

빗물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를 마셔

남은 가루를 뱃속으로 흘려보냈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남겨진 뼛조각은, 제비, 그의 아내이자 친구,

그의 또 다른 한쪽이 되었던 여인은

그의 뱃속에, 가슴 속에 묻혔다.

새벽이 되었다.

비는 그치고 싸늘한 가을 아침이 밝아왔다.

어디선가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물웅덩이를 스치고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름을 담아 보내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날갯짓이었다.

그걸 보며 그는 비로소 눈물을 떨구었다.

하늘처럼 무거운 죽음의 무게에 눌리면서도

제비는 저 날갯짓처럼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떠나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는 길을 떠났다.

한 사람을 잊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이럴 때 평생이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 좌백, 비적유성탄


Comment ' 22

  • 작성자
    Lv.94 미련한未練
    작성일
    11.11.16 01:00
    No. 1

    갑자기 다시 읽어보고픈 생각이 무럭무럭 드는군요..그 때는 몰랐던 느낌이 오지 않을까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소봉
    작성일
    11.11.16 08:07
    No. 2

    개인적으로는 먼치킨 깽판무협을 좌백식으로 잘 해석한 이색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5 달려라채희
    작성일
    11.11.16 09:02
    No. 3

    와우~~본문의 글이 참 좋군요~~좌백님의 글을 일전에도 몇번 접했으나, 개인적인으로 취향에 맞지 않아서 선뜻 손을 대지 않았으나 세월이 흘렀나요^^본문만으로도 가슴에 화악 와 닿는 뭔가가 느껴지네요.동네 대여점에 저책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퇴근 후 확인한번 해봐야 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왕털
    작성일
    11.11.16 10:24
    No. 4

    너무 여러번 읽다보니 이제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시에메이
    작성일
    11.11.16 11:07
    No. 5

    개인적으로 혈기린 외전을 한국 무협의 최고봉, 비적유성탄도 몇안되는 수작으로 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 허벌란
    작성일
    11.11.16 12:25
    No. 6

    깨알같은 위트가 좋았던 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1 관제짱
    작성일
    11.11.16 15:14
    No. 7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즐거운 작품입니다.
    신발짝으로 얼굴을 휘갈길때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던 기억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서우준
    작성일
    11.11.16 18:18
    No. 8

    옛날에 참 재밌게 읽었었는데. 아련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코끼리손
    작성일
    11.11.16 22:05
    No. 9

    비적유성탄은 무협의 황혼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더군요.
    일류고수 수준으로 먼치킨 깽판을 치는 주인공의 시대...
    일종의 활극인 데
    별로 감동 같은 건 없었습니다.
    좌백님의 무협에 대한 애증과 방황이 절실히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핏빛늑대
    작성일
    11.11.16 22:54
    No. 10

    저도 별로던데..(좌백님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대도오 최고, 그 다음 혈기린 외전, 많은 분들에 외면받는 야광충을 그 다음으로 꼽고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가릉도
    작성일
    11.11.16 23:18
    No. 11

    저도 핏빛늑대님 말에 동감입니다. 자고로 전 금강불괴가 젤 재밌더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66 서래귀검
    작성일
    11.11.16 23:45
    No. 12

    저 한텐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혈기린외전보다도 전 이 작품이 좋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하겐티
    작성일
    11.11.17 00:01
    No. 13

    저에게는 혈기린 외전 이후로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제일로 치는 한국무협1위는 혈기린, 2위는 표류공주, 3위는 비적유성탄 쯤이 아닐까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8walker
    작성일
    11.11.17 14:13
    No. 14

    구무협 작가들 글중에 비적유성탄, 색마전기(백야) 아주 색다르고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네요 ^^
    저는 좌백님 글 다 읽엇는데 그 중 대도오는 잘 기억이 안나고 혈기린외전 야광충 비적유성탄이 젤 기억이 남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6 아즈다
    작성일
    11.11.17 15:14
    No. 15

    천마군림만 완결 내주시면 참 좋을텐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4 숨산
    작성일
    11.11.17 16:10
    No. 16

    드디어 나왔다. ^^ 천마군림의 언급!!!! 아 길고도 질긴 그림자여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귀환객
    작성일
    11.11.17 17:48
    No. 17

    좌백님 작품중 생사박을 저는 수작으로 꼽는데 별로 언급을 안하시더군요!
    박투 무협의 진수를 처음으로 선보였고 그 스토리도 참 탄탄하게 끌어갔다는 생각인데요...
    잘 생기지 않은 추남이 주인공인 무협도 거의 최초라고 볼수있고요.

    말하고 나니 박투의 진한 묘사와 감동을 다시 새겨보고싶어지는군요.
    주변에 깔리던 그 음울한 감정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표산
    작성일
    11.11.17 21:43
    No. 18

    천마군림
    표사시리즈..........

    그러고 보니 완결안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낙시하
    작성일
    11.11.18 02:53
    No. 19

    비적유성탄, 개인적으로 이제껏 읽은 무협중 최고로 꼽는 작품입니다. 특히 서양이 중국에 개입하는 그 시점을 섬세하고 묘사하고 있죠.. 표현도 매우 훌륭하고.. 안읽으신 분들께 꼭 권해보고 싶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티그리드
    작성일
    11.11.18 13:17
    No. 20

    정말 큰 공부가 되엇습니다. 좋을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뽀오오옹
    작성일
    11.11.19 01:33
    No. 21

    좌백님이 천재로 불리는건 지금 나오는 신무협의 뼈대를 혼자 거의 다 만드셨다는 점이죠. 대도오 같은 경우 지금도 초반 스토리로 많은 작가들이 써먹고 있죠. 2000~2010 까지 나온 신무협들 보면 어? 하면서 느끼는 뼈대들이나 소재들이 상당히 많죠 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 빠페포
    작성일
    11.11.19 15:48
    No. 22

    좌백님 작품이 다 주옥같지만 혈기린외전 다음가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감상란 게시판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6461 퓨전 흑도현세 미니리즘 있습니다. +1 Lv.12 악마왕자 11.11.21 1,487 2
26460 판타지 [이에는 이]를 읽다 +9 Lv.22 리자드킹 11.11.21 2,292 3
26459 자연도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곤충 이야기 를 읽고 +4 Lv.22 무한오타 11.11.21 1,565 0
26458 무협 절대강호 7. 8 +5 Lv.13 얼음꽃 11.11.21 2,786 0
26457 판타지 권왕전생 7권 +9 dk2400 11.11.21 3,311 1
26456 판타지 본격신앙간증소설 브라반트의 흑기사 +13 Lv.99 Maverick 11.11.21 3,662 7
26455 퓨전 샤피로. 의심하고, 분노하는 주인공 +22 Lv.72 알퀘이드 11.11.20 4,769 4
26454 퓨전 삼국지 물의 최고봉! 같은 꿈을 꾸다 IN 삼... +10 Lv.67 superior.. 11.11.20 4,783 7
26453 판타지 프로스타 대륙전기를 보고 +7 Lv.3 suud 11.11.20 2,909 0
26452 무협 용중신권-네타 +7 Personacon 용세곤 11.11.19 2,949 0
26451 무협 와룡성수-3권(네타) +2 Personacon 용세곤 11.11.19 1,437 0
26450 판타지 프로스타대륙전기 4권 강추 네타조금 +3 Lv.3 대왕세종 11.11.19 2,428 1
26449 퓨전 그 마법사의 사정 +7 Personacon 블랙라벨 11.11.19 3,140 1
26448 기타장르 선입견을 버리자. '내가 법이다', '머셔너리' +6 Lv.71 소슬비가 11.11.19 3,797 5
26447 무협 황금공자 +7 Lv.24 리부인 11.11.18 3,398 0
26446 무협 수준이 다르다고...... Lv.18 che 11.11.18 3,835 9
26445 무협 절대강호 8권...행복해지고 싶습니다 +14 Lv.8 상냥한검풍 11.11.17 5,499 11
26444 인문도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근 읽은 것 중 최... +1 The Dark A 11.11.16 2,521 1
26443 퓨전 파슈파티 +14 Lv.1 고추장국 11.11.16 3,982 2
26442 무협 군림천하 (과도한 미리니름 주의) +14 Lv.69 사자인 11.11.16 6,157 4
26441 무협 송진용 / 풍운제일보 +1 Lv.12 드니드니 11.11.16 4,594 1
» 무협 좌백/비적유성탄... 어마어마한 필력... +22 Lv.12 드니드니 11.11.15 7,672 20
26439 판타지 폭염의 용제 9권 =순간 떠오른... +14 Lv.99 kimbh 11.11.15 3,554 1
26438 일반 꼭 이래야 했을까 : 그로테스크-기리노 나쓰오 +3 Lv.29 스톤부르크 11.11.14 3,789 0
26437 판타지 나이트워커 1,2권을 읽고.. +15 Personacon 시링스 11.11.14 3,901 1
26436 판타지 샤피로 9권 감상.. +11 Lv.1 赤月滿歌 11.11.14 4,387 2
26435 무협 귀환 진유청 9 +5 Lv.13 얼음꽃 11.11.14 4,418 1
26434 무협 매화검수 8 +6 Lv.13 얼음꽃 11.11.14 3,044 1
26433 퓨전 요새 재미있게본 장르소설들 +3 Lv.67 무풍검신 11.11.13 4,605 0
26432 판타지 불멸의 대마법사(1-3권)~ +4 Lv.1 케로파스 11.11.13 3,240 0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