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내 마음 가는대로 느낀 감상과 예단으로 채워진 글입니다.
그저 이런 생각도 있구나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읽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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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그리 재미있게 읽었다던 진가소전을 나는 정말 재미없게 읽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의 추천을 보고서도 임준욱의 소설을 찾지 않았다.
촌검무인을 손에 잡은 이유도 짧아서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것이 농풍답정록을, 건곤불이기를 읽게 하고야 말 줄을 상상도 못했다.
각박한 세상을 바로 잡는 임준욱식 해법은 정(情)이다.
임준욱은 인간을 참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이고, 그 선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정(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사람이 악을 품게 되는 경우는 바로 이 정을 잃어 버렸을 경우다.
임준욱의 정은 선악을 초월하는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가치다.
등장인물들은 그 정이라는 것에 순응한다. 그건 악역을 맡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정을 부정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정을 대표하는 것이 가족이다.
임준욱의 가족은 모두 끈끈한 정으로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며, 윗사람은 하염없는 정을 아래로 흘리고, 아랫사람들은 그 정을 거스르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관계다.
가족은 문파로 확대되고 문파가 다시 강호로 확대되면 참 이상적인 세상이 구현될지도 모르겠다.
임준욱의 정은 어쩐지 내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의 정은 너무 아름답다. 임준욱도 복잡하고 난해한 인간의 문제가 정 하나로 해결 되리라고 생각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교과서에서나, 종교에서 나올 법한 이상적 방법이 정이리라.
내가 그런 고상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불편함 만큼 그의 정이 불편하다.
더군다나 임준욱이 말하는 정은 너무 편향되어 있다.
일단 그의 소설에서는 정의 역기능의 경우에 대해 그리 깊이 고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족 이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패거리 문화나 지역차별의 근원을 파들어 가다 보면 그 정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또 임준욱의 정은 철저히 남자/가부장/맏아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정이다.
가부장인 남자주인공들은 그 정이라는 가치를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꿈을 버리고, 노심초사하며, 온몸을 던져 지켜낸다. 여성들은 지극히 수동적일 뿐이다.
문파/가정에 순응적인 인간이 그 틀을 깨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조금 확대시켜 생각해보면 임준욱을 보수적인 남자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임준욱만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다.
임준욱에게 변화의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으로 묶인 자신의 구역 밖이라도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고, 약한 자들을 지켜준다.
그에게는 지키고자 하는 욕구와 바꾸고자 하는 욕구가 공존한다.
임준욱은 소박하다. 그는 영웅이나 혁명가를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자기 주변의 작은 것을 지키고, 자기 주변부터 바꾸고자 한다. (물론 정을 기초로 한...)
어찌 보면 임준욱은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운동을 바라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그냥 소시민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소시민적 사고방식에도 많은 약점이 있겠지만, 임준욱이 주는 감동은 그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세상을 바꿀 힘도 없고, 그저 자신의 선택에 의해, 혹은 천형처럼 자기 어깨에 얹어진 책임의 무게에 허덕이며, 그저 세상에 맞춰 살 수 밖에 없는 소시민.
그러면서도 가슴 한 쪽에 봉인 되어있는 어렸을 때의 꿈은 황당할지는 몰라도 원대하고 다양하다. 임준욱에게 감동을 얻는 대부분의 무협 독자들의 삶이 그런 삶이 아닐까?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소설에 감동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라면 그림의 앞 못 보는 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임준욱의 주인공들은 진짜 소시민들은 모두 가슴 속에 묻어두고 만 꿈마저 이루어 낸다. 그러고서도 영웅이 되어 독자들과 다른 부류로 멀어지지 않고, 다시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온다.
이쯤 되면 소설은 완전한 용이 되어 승천하고, 감동의 힘은 안마당 먹은 이윤열이 된다.
독자 개개인에게 나도 붉은 배첩만 받으면 포이종 같이 날아오를 수 있다는 행복한 착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착각이면 어떠랴!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그런 면에서 임준욱의 소설은 실생활에서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양질의 청량제다.
어떻게 보면 촌검무인은 대충 쓰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고, 지금도 그 의심을 말끔히 털어내지는 못했다.(여기서 말한 대충이란 임준욱의 전작들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지라도 촌검무인이 내가 읽은 무협 가운데 일절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촌검무인은 작가로서 한 성인선언이 아닐까 싶다.
작가 임준욱의 나아갈 방향과 자신의 영역을 굳혔다는 자신감이 함께 들어 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촌검무인은 지금까지의 임준욱을 총 정리한 소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촌검무인에 나오는 윗세대 인물들은 과거의 임준욱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신이 예전에는 초룡산처럼 다른 작가를 질투하다 주회입마에 빠지고, 마계양처럼 타인을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에도 외면했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태평자처럼 자신이 지워진 실생활의 책임에 눌려 속세의 이익에 초연하지 못했고, 무당과 같은 타작가의 거대함의 그늘에서 허우적대기도 했고, 옥청전을 새로 짓듯이 글의 겉모습에 더 신경 쓰는 작가였노라고 자성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독자들에게 포이종처럼 경지의 끝을 보았으니, 이제는 화산검선의 경지를 바라고 부단히 검무를 출 것이라고.
그 때마다 피어오르는 매화를 지켜봐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또 하나 이 글은 “무엇을 쓸까?”보다 “무엇을 버릴까?”를 더 고민한 글 같다.
전작들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과하게 상관하던 넓은 오지랖도 버렸고, 그리 집착하던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부분도 과감히(전작들에 비하면 정말 과감히!) 생략해 버렸다.
독자들에게 내보이지 못해 안달하던 다방면에 걸쳐 모은 자료를 보여 주는 것도 자제한 인상이 역력하다.
그 맛이 참 담백하게 느껴진다.
한 없이 늘어지기만을 추구하는 근래 무협 소설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맛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맛을 계속 보여주는 임준욱이기를 바란다.
괴선의 소문이 조금씩 들린다.
괴선은 지금까지의 임준욱과는 다른 모습이 되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짐작해본다.
그럴 것 같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참고 있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자랑을 해도 완결될 때까지는 안 읽을꺼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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