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쓰고 나니 그냥 묵혀두기도 왠지 서러워 올립니다. 욕 먹는게 두렵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단 카이첼 님이 궁금증 같은 것에 답변해주셧음 좋겠다 하는 점도 솔직히 있음. 지금 올리려 하는데 지금부터 덜리는군요. 후덜덜.
작가명 : 카이첼
작품명 : 희망을 위한 찬가
장르 : 판타지의 탈을 쓴 철학서
[1]
이 [철학 소설]의 주인공은 은결이라는 한국의 고등학생이다. 일단 이 책은 일단 분류하자면 판타지 소설이라고 작가가 주장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책에서 이능력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다. 이 소설 전체에서 주인공이 남들에게 힘을 뽐내는 장면따윈 나오지 않으니까. 오히려 이 책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도, 넘치는 재능-주인공은 천재다-을 가지고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세상에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소외된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위대함으로 인해. 하지만 아버지를 소외시킨 이들은 악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중략/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떠받치는 가장 거대한 동기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들은 모두 불행한 사람이 없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해석하는 세계를 그들의 사랑을 통해 절실하게 믿었고, 실천했다. /중략/ 아버지에게 그들을 부정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에게도 아버지를 부정할 방법은 없었다. 양자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음일 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주장을 ‘믿을’ 수 있을 뿐이었다. - from <희망을 위한 찬가>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은결의 아버지는 은결보다 배는 더한 천재다. 그는 자신이 진출할 모든 분야에서 지구의 발전을 두세 단계는 끌어올릴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은결이 어릴 적 세상에 패배하게 된다 -일단은 그렇게 서술된다. 실제로는 인간들의 사념邪念에 패배한 것이지만- 이 일은 소설에서 은결에게 있어 ‘신의 죽음’과도 같이 묘사된다. 그가 동경하던, 염원하던 빛나는 아버지의 몰락으로 인해, 은결은 삶의 방향을 잃는다.
그의 아버지의 패배로 삶의 방향을 잃은 은결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를 몰락시킨 적들을 부정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가 곧 부딪친 문제는 그의 아버지를 패배시킨 수많은 다른 생각, 이념들은 ‘악惡’ 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들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념을 신뢰하고, 주장했다. 천재인 은결이 판단하기에, 세상의 모든 사상은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었고, 따라서 모두 ‘믿을 만’ 했다. 그가 바라보기에,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합당했지만, 또한 동시에 부조리했다. 이러한 모순 아닌 모순에 부닥친 그가 선택한 길은 결국 책을 읽는 것이었다. 알아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알고자 했다. 세상의 악의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를 부수기는 커녕 건드릴 수 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현대의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다. 부정 가능한 것은 모두 부정하고, 해체 가능한 것은 모두 해체된다는 이 철학적 조류 속에서, 이 소년이 확신을 가지고 알아나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더욱 가로막는 ‘반론에 반론’ 만을 연속적으로 체험했을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텅 빈 손이다. 존재하는 것은 짓뭉개진 혀다. 사르트르는 진보하는 인간을 주장한다. 실존하여 전진하라. 앙가주망. 사회적 구속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 하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침몰한다. 친족의 기본구조. 우리는 모두 구조의 노예. 우리는 각자가 생활하는 사회의 구조가 찍어낸 결과물. 끈에 매달린 피에로. 그러니까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다. 슬픈 열대. 그러니 오만한 진보의 이름으로 타자의 문화를 평가하고 뜯어고치려 하지 말라. 어설픈 무지와 사랑의 결합은 그 틈에 스며든 욕망과 함께 타자를 괴롭힌다. 차라리 침묵하고 존중하라. 그것만이 정답이다. 구조주의. 그래서 그것은 선험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 존재하는 것은 텅 빈 손이다. 존재하는 것은 짓뭉개진 혀다. - from <희망을 위한 찬가>
해석은 존재의 필연이고, 권력은 해석의 필연이고, 폭력은 권력의 필연이다.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세상에서, 소통은 언제나 해석의 대결이고, 폭력의 발현장일 수 밖에 없으니까. 사랑은 해석과, 권력과, 폭력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는 아무런 대답이 될 수 없었다. 아,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타자에게 개입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한다. 정의는 증명된 적이 없고, 진보는 실현된 적이 없다. 실현되지 못한 기준으로 세상을 잣대질하고, 옳음과 그름을 나누어, 감히 타자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지 말라. 침묵하라. 그들은 너와 다를 뿐이다. 다른 것 앞에서 침묵하라.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오만한 가치평가를 그만두라. 정답은 없고, 해석만이 있다. 해석만을 긍정하라. 차라리 시두리를 긍정하라. 그녀의 노래만이 진실이다. - from <희망을 위한 찬가>
이것은 그의 사상이 축약되어 드러난 부분이다. 그의 의식 저변에 머물고 있던,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 응축되고 뒤섞여 한번에 터져 올라왔을 때,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사념체 카미는 순식간에 해체되어 버린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사실들 중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결에게 남아 있는 것은 결국 ‘텅 빈 손’이었던 것일 테다. 그조차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장담할 수 없는 것만을 손에 쥐고 있기에, 감히 남들에게 자신 있게 내밀 수 없는 슬픈 손이었을 것이다. 남들에게 자신 있게 설파할 수 없기에 짓뭉개진 혀일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일까. 그렇다고 그가 가진 능력만을 과신하고 사회에 나가서 사회를 개혁하기엔 그의 아버지의 몰락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 크다. 결국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계속 책을 읽는 것이다. 어떠한 진실도 밝혀질 리 없고, 어떤 정의도 존재하지 않지만.
<신과 나눈 이야기>에 의해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던 나의 편협한 정의관과 윤리관을 확고하게 부수어 버린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어떠한 ‘절대적인 정의’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는 감성적인 이유에서 선택된다고 말한 로티Rorty의 한마디가 훨씬 와닿는다. 결국 나의 모든 이념도 ‘이미지’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었으니까.
젠장.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철학이 전개되어 버리면 솔직히 난감하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이념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다원주의와 해체주의는 매력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런 확고한 정의조차 세워주지 않으면 나는 믿을 게 없어진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시장 경제에 집착하는 이유, 금융공학자들이 ‘적정가격’이라는 신에 확고하게 매달리는 것도 이렇게까지 삶의 확신을 잃고 나니 솔깃하게 들려온다.
만일 내가 무한정한 능력이 생겨나서 당장 아프리카로 달려가 아프리카의 수억 인구를 구제한다면 이것은 옳은 일인가? 만약 그 결과로 지구상의 인구가 수없이 불어나 결국 지구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고 해도? 이런 것이 바로 은결이 부닥친 문제이고, 덤으로 내가 꼽사리 껴서 똥줄타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지만, 은결의 능력도 역시 무한하고, 그렇기에 그 힘을 행사함에 있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쿠로사카는 언젠가 은결과 함께 영화를 보고난 뒤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 영화는 슈퍼맨이었다. 왜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진 슈퍼맨은 진정으로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은결은 그렇게 물었다. 이어서 답했다. ‘모르’기 때문이라고. 가장 성결한 선의로 추진한 일이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바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이제 도무지 행위에 대한 확신을 얻는 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 from <희망을 위한 찬가>
[2]
희망을 위한 찬가에서 은결의 ‘진보’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요인은 타자와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가의 여부이다. 은결의 아버지인 수행은 폴 발레리를 예로 들며 삶에서의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삶에 있어서 그러한 오해는 오히려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수행관(?)은 신자유주의에 관한 그의 사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은결의 경우는 수행과 달리, 그와 같은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가 싸우는 대상이 사념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인간의 사념은 대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표출되는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서로 마음 속에 꿍쳐 둔 ‘숨겨진 이야기’ 이었기에, 그와 같은 것을 거의 매일 상대하는 은결로서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한 마음의 교류 없이 이뤄지는 피상적인 대화로 보였을 테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해서겠지만 조금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은결이 실망하는 이유가 단순히 인간들의 행동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발전을 가로막아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소통’ 자체에 실망하고 있는 것일지도. 이 책 마지막에서 그노시스트(최종보스)가 은결에게 ‘인간들 하나하나는 아름답지만 그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빚어내는 이 악의 가득찬 구조란 무엇의 농간인가?’ 라고 던진 질문에 은결이 제대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던, 그 아픈 사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
이 책을 읽다가 떠오른 괜찮은 생각이 있다. 이 소설 마지막에서 은결은 세상의 완전한 개혁이 불가능할지의 여부를 두고 수행과 일대의 내기(?)를 벌이게 된다. 이 이상의 설명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하지만, 그는 여기서 체첸의 분쟁지역으로 가게 된다. 결코 나아질 리 없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그는 상상력으로 꿋꿋하게 봉사를 지속해 나간다. 그런데 떠오른 재미있는 생각이란 은결이 굳이 커다란 고민을 할 필요 없이, 아주 간단하고 확실하게, 지구 전체를 개선할 방안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 불행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는 본래 나의 것이 아니고 결코 될 수도 없는 물자체에 인간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물자체에 집착하는 이유는 재화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만약 지구의 물자가 무한대가 된다면, 그 순간 인류는 전반적으로 선하고 안정될 수 있다. 이것이 뜬금없고 어이없는 소리일까?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를 알고 있다. 바로 정보가 무한히 복사되는 디지털 세계이다.
내가 가진 무엇을 남들에게 나눠주어도 사라지지 않는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이 무엇인가? 공유共有! 좋은 것은 나눠갖는다! 바로 이 정신이다. 자신이 무엇을 나눠주어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조건 하에서, 인간은 단지 타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기꺼이 우리의 것을 나눠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인류 대부분이 굳이 싫은 일에 매달리고, 이득을 위해 서로 속이고 합치고 하는 추태를 되풀이 할 필요도 없다. 불가능한 소리같다. 불가능한 소리이다. 하지만 <희망을 위한 찬가> 에서만큼은 가능한 세계였다. 왜냐? 은결은 “역장”이라는 희대의 기술을, 책 속에서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모든 상상 가능한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역장은, 현자의 돌 그 자체로, 10년의 교육과 그 이상의 보완으로 어떤 인간이던지 자기 맘대로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킬 수 있는 ‘제조기’다. 이것은 수행이 책 속에서 꿈꿔왔던 그 세계를 실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생산력이 극도로 발전하여, 길가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고, 사람들이 재화에 얽매이지 않는 사회. 사람들이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적 수양을 욕망하기 시작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어쩌면 낙원의 도래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여기까지 써내려오고 나서야 수행이 어떠한 이유에선가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였다’라고 적혔던 것이 떠오른다. 이런. 하지만 솔직히 괜찮은 발상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수행은 현자의 돌도 알고 있었던 셈이니, 이래서야 작가님이 파 놓으신 함정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간 꼴이군.
이상으로 감상은 끝내려 하지만, 솔직히 그냥 끝내긴 아깝다. 추천도 하지 않고 그냥 가기도 뭣하다. 위에 주절주절 적어 놓은 감상이라도 한 번 읽어 보시고, 희망을 위한 찬가를 읽어 보고 싶으신 마음이 생기신 분은, 당장이라도 게시판으로 뛰어 들어가(?)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 오랫동안 묵혀왔던 생각들입니다. 카이첼님이 봐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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