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황규영
작품명 : 천왕
출판사 : 드림북스
내가 황규영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 3월 말, 차다고 해야할지 뜨겁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감촉만은 부드러웠던 봄 햇살을 한껏 받으면서 소파에서 뒹굴거렸던 때였다. 오수의 평안함이 지나고 나자 지루함과 무료함이 엄습했고 생각 없이 내가 다니던 커뮤니티 사이트에 질문을 올렸다.
<뭐 잉여잉여하게 시간 때울 만한 무협 없을까요? 아주 가벼울 필요는 없고 '태극검제' 수준이면 되는데'>
여러 말들이 올라왔다. 그 중 한 사람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추천했다.
<잠룡전설은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때 딱히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컴퓨터 사방 1장 이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본인은 불경하게도 어둠의 루트를 통해 추천받은 책들을 뒤적거렸고 그 중 잠룡전설이 제일 구하기가 쉬웠다. 드러 누워 키보드를 배에 붙잡고 희희낙락하며 읽던 잠룡전설, 그러나 잠룡전설은 그렇게 한낮의 시간만 대량학살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가에 미소를 배어 물며 미친 사람처럼 웃고 머릿속으로 주인공 주유성을 그려보던 본인은 무료함도 잊고 당장 서점에 달려가 잠룡전설을 주문... 하지는 않았고 아X존(아, 생각해보니까 x마존이 아니라 YES24다. 쇼핑몰도 헷갈리다니 =_=;;)을 이용했다. 어쨌든 컴퓨터 사방 1장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황규영의 일명 '청바지와 박스티' 시리즈 1편 잠룡전설을 독파한 본인은 그 이후로 잠룡전설 같은 글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헤매고 헤매도 같은 글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 죽이면서 낄낄대는 괴상한 무협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결국 본인은 황규영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실망임과 동시에 기쁨이었다.
금룡진천하, 천년용왕... 황규영이 잠룡전설 이후에 써내려간 책들은 대부분 잠룡전설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언제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가 같았으며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성격 역시 잠룡전설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고 특히 금룡진천하에서 그 특징은 더더욱 도드라졌다. 애초에 잠룡전설 같은 글을 찾았던 본인으로써는 어찌 보면 기쁘지만 어찌 보면 황당하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금룡진천하 열 권을 전부 읽었을 때는 일종의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이건 오히려 잠룡전설보다 퇴보한 것이 아닌가? 너무나도 평면적이고 웃어 넘길 비정상적인 개그요소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은 작품의 큰 단점이다. SKT가 무개념한 베르스의 대신들이 저지른 헛짓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바람에 얼마나 욕을 들어먹었는지를 떠올려보자. 실망감으로 몸을 떨며 금룡진천하 10권을 덮은 본인은 감도는 씁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천년용왕을 뽑아들었다.
천년용왕은 씁쓸했던 본인의 속을 어느정도 달래주었다. 딱딱 끊어지는 단문은 전체적인 배경을 굉장히 살풍경하게 만들어 몰입감을 감퇴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경보다 인물을 두드러지도록 만들어 인물에 더욱 몰입하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 누군가의 비평처럼 천년용왕의 단문은 과연 희곡처럼 짤막한 면도 있지만 본인은 덕분에 더욱 허무정이라는 인물을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배경이 실재하는 현대라면 모를까 과거나 판타지에서는 인물을 부각시키는 문체가 더욱 올바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 본다. 상상력이 굉장히 뛰어나지 않다면 모순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러는게 좋지 않을까? 묘사가 꽤나 무감각하고 무감동했기 때문에 인물의 심리가 절절하게 느껴지던 '마신',좀 과장하여 예를 들자면 '칼의 노래' 처럼 말이다.
천년용왕의 주인공 허무정은 주유성이나 진초운처럼 만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무겁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진중한 성격이다. 그리고 그 달라진 성격은 황규영 작가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해주었다.
<천하제일협객>과 <참마전기>를 읽고서 황규영이 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본인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천하제일협객은 무공이 굉장히 높은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을 찾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내용이 추리에 더 가깝다는 점이 특징이었고 참마전기는 유난극이란 따뜻한, 그러나 어두운 과거를 가진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맹하지만 뭔가 미묘한 매력을 가진 황규영 특유의 캐릭터를 주유성과는 다른 방법으로 잘 살렸다. 히로인들의 성격 역시 판이하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행동에 합리성이 생겼으며 바깥으로 표출되는 개성과 동기 또한 잘 잡았다. 적어도 모든 인물이 정치적인 이유로 주인공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황규영이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라는 생각이 이때부터 슬슬 희석되기 시작했다. 이런 나에게 결정타를 날린 소설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천왕>이다.
천왕은 <금룡진천하>나 <잠룡전설>, <참마전기> 등등 황규영의 무협들과 궤를 상당히 달리한다. 명문의 자제로써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잘생긴 얼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기연이 있었다는 것과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맹한 인물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애초에 무협 주인공 대부분이 천부적인 재능과 기연을 동시에 거머쥔 인물임을 생각하면 그 두 가지는 그다지 큰 허점이 아니고 천왕에서는 황규영의 전작과는 다르게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아닌, 실제로 그럴 법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하며 또한 그런 실수가 스토리의 진행에 주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강도진의 성격 또한 황규영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성격과 말버릇을 가진다. 우유부단하며 수류운공처럼 망중한을 즐기는 게으른 인간이 아닌 약삭빠르지만 어딘가 맹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로 말이다. 인물이 대부분의 스토리를 진행해나가는 황규영의 소설에서 인물의 변화는 그야말로 주목할만한 변화라 할 수 있겠다.
또 우스꽝스럽고 명분을 따지는 악역을 내세워 주인공을 몰아붙이는 데에서는 드디어 현기가 느껴졌다. 황규영의 소설들이 양판소라 폄하받는 소설처럼, 뚜렷한 위기와 절정을 가지지 않는데도 밋밋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함부로 들이대며 공박하기도 힘든 괴상하게 합리적인 명분과 억지를 들이대는 악역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덕택에 네가 영물을 먹어 강해졌고 세상을 구원했으니 내가 곧 세상을 구원한 것이다>, <적에게 항복했고 내가 너를 속여서 죽이려고 들었지만 그것을 네가 알아차리고 계략을 꾸며 오히려 적을 사로잡았으니 그것은 내가 너만은 이 작전을 알아차리도록 허술하게 작전을 꾸며 적을 유인한 탓이다>,<네가 구파일방의 무공비급을 떼거지로 찾았는데 우리 청성의 것만 없으니 이것은 바로 네가 청성의 무공비급을 탐내 청성의 것만 숨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성의 무공을 익힌 네 사지근맥을 자르겠다.> 와 같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악역들은 굉장히 입체감이 있고 생동감이 있어서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주인공에게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역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며 주인공에 몰입하는데 굉장히 도움을 준다.
이러한 특성을 가졌음에도 그 표현이 넉넉치 못해 소설이 밋밋하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황규영은 이번에는 유승범을 비롯한 악역들의 자기합리화를 굉장히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어조로 서술함으로써 소설의 활기를 찾았다.
과거처럼 조연을 무턱대고 벌리지 않고 단기 조연과 장기 조연으로 나누어 인호 같은 인물조차 끝까지 끌고 가는 그 집착에서는 아 이 작가가 욕 먹고 속 좀 쓰렸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약간 편집적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결점이 없었다.
또 한가지 천왕에서 주목해야할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말장난의 도입이다. '철이 넘치는 대철공방에서 가장 철없는 아가씨 철장미', '도둑들 중에서 쌍놈들만 모여 있어서 문파명이 쌍도문', '강도나 다름없이 장사를 해서 강도진' 같은 설정과 말들은 독자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를 흘리게 만든다. 또한 중원에서 어려운 한자말에 휘둘리는 무협에 한 가지 길을 제시한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위의 말장난을 중국어로 번역하면 과연 중국인들이 알아 들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가장 큰 암시와 복선인데 그 이름을 짓는 방식의 근간이 한국어에 있으니 어찌 한국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으랴? 그것이 말장난에 불과할지라도, 이것은 일종의 자주성의 물꼬를 튼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확대해석을 해 본다.
물론 장점 외에 만만치 않은 단점 또한 눈에 띄었다. 변하지 않는 패턴, 1,2의 세력이 맞붙고 제 3의 세력이 호시탐탐 양패구상 이후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것은 지겨울 정도로 똑같았다. 작가도 이 점에 나름 고민을 했는지 천룡검문을 끼워넣었지만 수가 셋이든 넷이든 짜임새는 똑같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설정의 반복은 전작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환골탈태라는 말을 써도 아깝지 않은 천왕이라는 소설이 아직 잠룡전설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 큰 요소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본인은 황규영이 결국 이러한 요소도 극복하고, 표사에서 보여줬던 결코 얕지 않은 인물의 근저의식을 표현함과 동시에 부드럽고 맹한 황규영 캐릭터의 매력을 살린 작품을 만들고야 말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또한, 아직까지 황규영이 돈맛에 길들여져 변화를 전혀 모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인지부조화와 편견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새삼스런 눈으로 황규영의 작품을 읽어주면 안 될까? 하고 말이다. 작품은 여운을 남긴다. 작가의 필체와 글의 구성에도 여운을 남기지만 독자의 눈에도 남긴다. 잠룡전설이 드리운 잔영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황규영의 글을 읽어본다면 아마도 황규영이 아무런 고민 없이 자가복제를 일삼고 매너리즘과 돈맛에 빠진 지나치리만큼 심한 혹평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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