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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상상 속의 개들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
13.09.28 13:10
조회
1,189

내 개는 세 마리다.
셋 다 주인을 잃고 겁에 질려 길거리를 헤매는 것을 내가 데려와 키우게 된 놈들이다.
첫째는 죽은 내 큰딸을 쏙 빼닮았다.
진도개의 그것을 축소한 듯한 잘생긴 두상에 좀 짤막한 다리ㅡ전형적인 잡종이다.
이녀석은 성질이 좀 있다.
매사에 동생들보다 자신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줄 것을 내게 요구한다.
과자 하나를 먹어도 자기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먹어야 직성이 풀려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소홀하다 싶으면 즉각 토라져 자주 앉는 소파 한쪽에 올라가 고개를 모로 트고는 내가 달래러 갈 때까지 뚱한 얼굴로 분노를 씹곤 한다.
동생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일차적 관심이 자신을 제치고 동생들에게로 쏠리는 일을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두째는 잡종 피가 많이 섞인 족보견이다.
이놈은 다리가 하나 없다.
위험한 찻길을 절뚝거리며 다니는 것을 내가 발견하여 집에 데려왔다.
다리는 하나 없어도 이녀석은 대단한 미인이다.
유난히 긴 황금빛 손눈썹, 목 아래로 길게 내려뜨려진 넓다란 귀, 우아하고 길쭉한 주둥이....
차분하고 여성적인 성격이다.
가장 손이 많이 가면서도 또한 가장 돌보기가 편한 녀석이다.
목욕을 시키거나 발톱을 깎는 따위의, 다른 개들이라면 모두 끔찍해 하는 손길에도 녀석은 일체 저항하는 법 없이 온순하게 자신을 내맡긴다.
일단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한테는 말이다.

세째, 이녀석에게는 내가 항상 미안하다.
시샘 많은 첫째와 늘상 세심하게 돌보는 손길을 필요로 하는 두째에게 밀려 과자건 스킨십이건 항상 맨 나중에 차례가 돌아간다.
외출에서 돌아온 나를 향해 가장 앞장서 달려오지만 내 손길을 가장 늦게 받는 녀석이다.
그래도 워낙 성격이 좋아 상처를 받는 법도 없다.
언제나 쾌활하고 언제나 낙천적이고 매사를 긍정할 준비가 돼 있다.
그래도 간간이 녀석이 물어씹어 못 쓰게 만들어 놓은 나무 브러시나 신발짝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걸 보면 녀석도 은근히 남들 모르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더럽고 볼품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던 녀석들도 내가 잘 먹이고 꾸준히 씻기고 빗질을 한 덕분에 바깥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무슨 특이한 족보견인 줄 알고 무슨 종자냐고 물어 올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다.
여배우들에다 비하자면, 첫째는 나스타샤 킨스키, 두째는 기네스 펠트로, 막내는 맥 라이언 분위기라고나 할까.
다만 맥 라이언한테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눈가가 항상 젖어 있어 진물이 나오는 상태인 것이다.
나는 녀석의 눈곱을 손으로 떼어낼 때마다 속삭이곤 한다.
  "미안하다. 하지만 니 눈 치료할 돈으로 동물보호단체에 한 푼이라도 더 성금을 내야 해. 거기 아이들은 진짜 불쌍하거든. 니한테는 내가 있으께네 눈병쯤은 참을 수 있제?"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우중충하다.
오후쯤에 한바탕 비가 쏟아질 모양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떠먹는 호두 아이스크림은 별미다.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이 반 통밖에 남지 않은 것을 기억해 낸 나는 날이 더 흐려지기 전에 얼른 아파트 단지 수퍼에 다녀오기로 한다.
  "우리, 아이스크림 사러 가까?"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 나를 본 녀석들이 이미 눈치를 채고 따라 나설 준비를 한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물어 본다.
그 한 마디가 녀석들로 하여금 이 짧은 외출을 더 신나는 일로 여기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 먼 나들이라면 세 놈 중에서 둘만 데리고 가지만 오늘은 바로 코앞에 있는 수퍼에 가는 것이니 셋 다 데려가기로 한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올 때는 품에 안았던 두째를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내려놓는다.
가뜩이나 운동이 부족한 놈이니 조금이라도 걷게 할 수 있으면 걷게 해야 한다.

드디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까?"
냉동실에 잘 얼려 둔 아이스크림을 꺼내는 것을 본 녀석들이 벌써부터 꼬리를 치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나는 또 일부러 물어 본다.
녀석들은 이제 환장을 한다.
녀석들의 개인 접시에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씩 떠다 준다.
물론 첫째의 아이스크림이 제일 양이 많다.
트레이를 들고 베란다로 가는 내 뒤를 세 놈이 펄쩍펄쩍 뛰며 쫓아온다.
아이스크림 한 통을 이렇게 우리 넷이 나눠 먹으면 양이 딱 맞는다.

천둥이 우루루 치자마자 첫째가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셋 중에서 이놈이 사실은 제일 겁이 많다.
아무리 쓰다듬어 주어도 녀석의 공포는 가라앉지 않는다.
내 무릎 위에서 녀석이 하도 요란하게 부들부들 떨어 대는 통에 마치 전동 안마를 받는 듯하다.
첫째의 공포가 전염된 두째와 세째도 내게로 왔지만 내 무릎에는 남는 공간이 없다.
할 수 없이 나는 노트북을 덮고 소파로 가 팔걸이를 베개 삼아 길게 드러눕는다.
가슴팍에 첫째를, 허리께에 두째를, 발치에 세째를 쭈루루 올려놓고 눈을 붙인다.

비발디를 씨디 플레이어에 올려놓고 저녁 설거지를 시작한다.
잠시라도 나와 떨어져 있기를 싫어하는 녀석들은 공연히 내 발치에 와서 서성인다.
이 시간은 항상 클래식 감상 시간이다.
손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들으면 클래식도 그리 지루하지 않다.
그 중에서도 비발디보다 더 설거지에 어울리는 음악은 없다.

날이 많이 쌀쌀해졌다.
오늘 드디어 고타츠 전원을 켰다.
하얀색 고타츠 상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자판을 두드리는 내 곁에 세 놈이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이런 때는 모과차를 마시고 싶다.
  "가서 모과차 한 잔 끓여온나.'
첫째에게 시킨다.
녀석은 여느 때와는 달리 내 어조를 통해서도 내가 자기에게 대략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할 수 없어 눈만 껌벅거린다.
  "모과차도 못 끓이나? 바보."
이제는 내가 자신에게 핀잔을 주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녀석은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돌린다.

도서관에 책을 바꾸러 가야 한다.
자전거 핸들 앞쪽에 매단 큼지막한 철망사 바구니 바닥에 담요를 깔고 두째를 거기에 앉힌다.
제 형제들보다 거동이 불편한 녀석에게 속도가 주는 쾌감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서다.
책을 바꾸고 돌아오는 길에 단골 빵집에 들러 빙수를 하나 주문한다.
개를 데리고 들어가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빵집을 주위에 둔 것도 행운이다.

며칠을 두고 내렸던 비가 뚝 그친 다음날, 일부러 세 놈을 모두 데리고 산으로 간다.
가능한 한 녀석들로 하여금 다양한 경험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서다.
여기저기서 물방울들이 연신 후두둑 떨어지는 숲을 가장 즐기는 놈은 역시 막내다.
몸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나무들 사이를 내달린다.
첫째는 그리 신명나지 않는 듯한 얼굴로 풀숲들을 뒤지며 코를 킁킁거린다.
입 짧은 아가씨들이 내키지 않는 음식을 젓가락 끝으로 께작거리는 식이다.
두째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깡총거리는 품이 자기 나름대로 이 축축한 산책을 즐기는 눈치다.
그러다가 길이 조금 험해지는 곳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다본다.
그러면 나는 녀석의 몸을 들어올렸다가 좀 평탄한 곳에서 다시 내려놓는다.


오늘은 약수터까지 가지 않고 중도에서 돌아선다.
그래도 진창길을 걸었던 세 놈은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상태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세 놈을 모두 욕실에다 가둬 놓는다.
그리고 한 놈씩 차례로 목욕을 시킨다.
첫째는 목욕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체념에서, 그리고 두째는 내가 자신에게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신뢰에서 다소곳이 내 손길에 몸을 내맡긴다.
하지만 세째 이놈은 소용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세 녀석을 모두 목욕시키고 나면 어지간한 나도 조금 지친다.
불을 넣은 고타츠에다 녀석들을 밀어 넣고, 조금 뒤에 마실 생수를 유리잔에 따라 냉동칸에 넣어 두고, 욕실 바닥에 쌓인 젖은 개털을 모두 치우고, 흙물 묻은 옷들을 모두 벗어 빨래바구니에 던져넣는다.
이번에는 내가 목욕을 즐길 차례다.
나는 느린 피아노 독주곡을 플레이시킨 다음, 솔잎 향기 나는 목욕소금을 푼 뜨거운 물에 천천히 몸을 담근다....


아니,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꾸며낸 얘기들이다.
나는 개를 키우지 않는다.
내 소유의 아파트도 없고 고타츠도 없다.
현재 내가 얹혀 사는 집에서는 내가 개를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왕에 키우던 개조차도 없애라는 압력이 심심찮게 들어오곤 하였을 지경이다.
그러니 내가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내 명의의 집을 장만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개를 키우고 싶어도 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능한 인간에게 그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영국 수필가 찰스 램은 '꿈속의 아이들'이란 수필을 썼었다.
그가 간절히 원했으나 끝내 가질 수 없었던 아이들이 그의 꿈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가 한 얘기들은 바로 램의 그 꿈에 해당되는 셈이다.
램이 꿈속에서 한 일을 나는 멀쩡한 각성 상태에서 하였던 것이다.
내게 있어 개를 쓰다듬거나 함께 산책하는 일은 먹고 잠자는 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에 속하니까.
오늘도 나는 밤길을 터덜터덜 걷거나 단조로운 마루 걸레질을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면 상상 속에서 나의 개들을 만난다.

 

 

(5,6년 전의 글입니다. 지금은 형네가 키우던 대형견 한 마리, 그리고 길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소형견 두 마리, 세 놈을 데리고 삽니다.)

 


 


Comment ' 2

  • 작성자
    Lv.14 Dainz
    작성일
    13.09.28 18:20
    No. 1

    한국에도 코타츠를 쓰는 사람이 있나?? 문체도 그렇고 2ch일본애들 글인줄 알았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9.28 18:47
    No. 2

    고타츠 만들어 파는 한국 기업도 있습니다. 제 문체가 일본 애들 같다는 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2ch가 뭔지도 모르겠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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