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김용
작품명 :무
출판사 :
1-무협 역사상 가장 독특한 시작
혹, 신조협려를 보지 못했거나, 또는 다시 읽으실 분이 계시다면 작가 김용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의깊게 읽어 보시길 바란다. 어린 아이들이 배를 띄우고 놀면서 시작하는 서장은 무협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이니 음미할 필요가있다. 왜? 아이를 너무 아이답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묘사는 너무나 리얼하다.
2-진정한 리얼은 무엇인가
신무협의 실존주의든 뭐든, 잔혹하고 비일반적 사고와 사건의 연쇄가 실재인양 다뤄지고 있는 현재에 비추어보아, 김용식의 실재는 어떻게 다른가. 바로 그것이 문제다. 오늘날 (한국)무협세계의 리얼리티란 잣대로 작가 김용을 들여다보면, 분명 그는 낡은 클리셰와 기연 따위의 작위적 설정에 읽기가 진부해지는 낡은 낭만주의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작가 김용을 비판하는 일군의 목소리는 바로 그렇지 않는가? 설봉이나 좌백이라는 리얼로 포장된 비정성이 김용에게는 떨어지고, 신파에 가까운 러브스토리등등..
3-하지만 당신들은 잘못 알고 있다
사태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오늘날 비장미와 어떤 비범주속의 이야기들을 추종하는, 마치 그것이 전적으로 유물론적인양 오해하는 무협 신도들에게 나는 반대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오히려 김용이야말로 리얼하다!
4-어째서 그러한가
첫째는 묘사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신조협려의 도입부 부분을 보자.
{'얘, 저 사람 좀 봐. 아직까지 그냥 서 있네.'
정영이 버드나무 아래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사내의 머리는 봉두난발에 수염도 고슴도치 마냥 어지럽게 나 있었다. 나이는 얼핏 짐작이 가지 않지만 온통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로 보아 거의 7,80의 노인네 같았다. 몸에는 남색 천을 걸치고 목에는 어린애들이 사용하는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턱받이에는 이미 낡아 해진 자수 한 점이 수 놓여 있었다.
'저 괴한은 어째 꼼짝달싹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저렇게 서 있을
까?'
육무쌍의 말을 받아 정영이 말했다.
'괴한이라 하지 말고 아저씨라 불러. 괴한이라고 불렀다가 화를 내
면 어떡하니?'
'괴한이 뭐 어떻다고 그래? 저렇게 늙었는데 애들처럼 턱받이를 달고 있잖아. 화가 나서 수염을 모두 곤두세우면 정말 보기 좋겠는걸.'
육무쌍이 웃으며 배에서 연실 하나를 집어들어, 괴한의 머리위에다 던졌다.}
담백한 묘사다. 우선 살펴봐야할점은 작가 김용식의 인물 묘사에서 나오는 미메시스다. 김용의 인물 묘사는 매우 타당하고 보편적으로 보인다. 그 즈음 나이때에 나오는 천진함과 이기적인 어쩌면 광기가 서려있는 복잡한 모습을 컨트롤 하지 않고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작가 김용 무협의 특색은 각 인물들의 날것 그대로의 묘사들인데, 소위 한국 신무협들이 깔아놓은 담론들과 어떻게 다른가? 신무협들을 읽어보면 인물들이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전적으로 모든 것이 강박적인) 묘사되고 있으며(애 늙은이), 그것은 비장미로 포장하고 날 것인양 칼부림을 해단다. 그것이야말로 거짓 유물론이 아닐까?
신무협(구무협, 신무협에 대한 구분 제쳐두고)의 대다수 인물들은 그 작품 안에서 자기의 캐릭터를 가지고 놀지 않는다. 강박증적 작가의 의지와 내러티브 안에서 충실히 연기하는 꼭두각시 수준을 못넘는거 같다. 이미 그들의 성격은 정해져있고, 이미 자아가 확고하며, 이미 강박적인 성격 패턴 안에 있다.
즉 신무협의 비장미나 기타등등의 유물론적 묘사는, 그 이면 아래 감춰진 관념적 엘리트주의의 느끼한 허상일 뿐이란거다. 오히려 인물을 대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유물론은 작가 김용에게 있다. 썰을 풀어보장~
5-우리의 미래 시제 김용!
둘째 욕망하는 주체를 그린다. 신무협이 작가 김용의 유산에서 배운거라곤 몇가지 잔재주에 지나지 않다. 그렇지만 아직 정수는 아닌데, 김용을 넘으려는, 거기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줄달음속에 정작 이어 받아야할 유산까지 사장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김용 무협의 특색은 인물 각 주체마다 욕망을 한다는것.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해보자. 인간이 욕망을 대상을 갈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결핍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신만이 욕망을하지 않는데, 모든것이 완벽한 존재는 어떤 것을 갈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사를 돌아보면 욕망이 역사와 사회를 움직이고 또 다른 단계로 변증법적 운동을하는 원인이 된다는것을 보게된다. 그렇다. 주변만 훑어봐도 인간은 욕망 덩이리인걸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 시기와 질투를하는 군상들을 흔히 보게된다.
어쨋든 작가 김용의 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곰곰히 김용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다.
일단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주체적으로 욕망을 가진게 아니다. 예를들어 신조협려의 주인공 양과를 보도록하자. 그가 처음부터 소용녀를 욕망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면 이야기는 단순해지지 않는가? 김용의 주인공들은 정확히 말해선 욕망하는게 아니라 욕망하게 되어진다!
이미 우리는 철학자 미셸 푸코와 라캉에 의해서 금지가 욕망을 낳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는 사회적 상징에 의해서 욕망이 움직인다는 사실도 말이다. 즉 작가 김용이 그려낸 인물들은 사회적 금기-터부-윤리에 도전하며(또는 침잠하며), 그 속에서 곤란에 빠진, 우리 현실속 자신들의 우화이며, 동시에 상징적 인물들이다. 그들은 여성이나 아버지라는 대상을 통해 결핍과 욕망을 배우며, 그것은 사회와 개인간의 어떤 세련된 담론으로 이어진다.
반면 신무협은 어떤가? 그들은 다채롭지 못하고 더나아가 욕망되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태생부터 욕망하는 기계로, 성격과 기타등등의 특성들은 이미 주어져있으며,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도 아닌, 말 그대로 자동기계로써 무엇인가 완성하기 위해 단선에 가깝게 움직인다.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사회의 금기와 도착적인 도덕들은 욕망을 낳지만, 그 욕망의 인두껍을 벗겨내며 김용은 그 안에 분열되어 불안한 주체를 그린다. 그것이 바로 문학에서의 진짜 리얼리티인 것이다.
6-오~ 리얼한 김용이여!
셋째 사회에 도전하고 허물다.
김용을 비판하는 가지중에 그를 중화주의자라고 비약해서 비하하는 분들이 계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오해, 또는 국수주의적인 반발이 아닌가. 굳이 곽정이 몽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자명한 사실인거 같다.
김용의 후기작 녹정기를 보면 주인공 위소보는 번번히 대명복권 운동과 청나라 황제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그는 어느쪽에서 속하지 못한 또는 속한 이기적인 사람인데, 이를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을 것을 보고 중화주의자라고 욕할 수 있을까?
사실 작가 김용은 권수가 더해질 수록 반골적 기질이 드러난다. 인간 관계를 의심했던 전반적 분위기에, 윗 세대의 은원에 저항하는 중기를 지나서, 위소보가 등장했던 녹정기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즉 작가 김용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관습과 타부를 주인공들을 통해 웅변하는 보수주의(중화주의자)가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며 때론 고뇌하며, 그것을 더 초월한 어떤 윤리적 상태를 사변적으로 고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협소한 중화주의 따위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중화주의는 칸트식으로 번역하자면 보편적이지 못하다. 중화주의 따위의 보편적이지 못한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 사랑받는다고 주장하는것은, 훌륭한 내러티브의 기본 충족요건을 이해못한 무지의 발언들일뿐.
신무협들에게 불만인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어떤 윤리적 행태를 사유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단순히 없는 상태를 가정한(혹은 그 속에 음모나 더러운것들) 이야기들을 양산하고있다. 그런 담론에 따르면 김용은 매우 근대주의적인 작가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 근대적 의식들이 허구라면 어쩔 것인가? 또는 그런 태도들이 김용을 왜곡해서 보고 있다면 말이다.
어떤 것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떤식의 사회적 관념을 상정해야한다. 하지만 신무협들은 관습이나 관념에 저항하기보다, 이미 그것이 무너진 상태의 냉소를 거듭하고 있다. 대상이 되는 세계가 없다면 저항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사회적 유물론을 잃어버린 신무협 전반의 자폐적인 특성은, 두 세력간의 음모와 수평적인 정치 대립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모사꾼과 주인공 곁에 지략가를 덤으로 끼워팔고 있다. 이런 징후는 오늘날 정치 환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예를들면 이명박식 실용이나, 합리주의 따위로 말이다. 이것이 왜 자폐인가.. 그런 태도들이 전제한 상황에서의 사회 모습은 모순이 가득한 세상이 아닌, 모순이 없는 매끄러운 단지 적과 나의 상상적 반영 속에 위치한 기형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이것이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추켜세우는 몇몇 경향들이 내세우는 담론들이 과연 옳은가?
리얼리즘은 과연 무엇인가. 윤리와 도덕과 법과 관습과 타부들, 그리고 그것에 걸린 불안한 주체들. 만약 그대가 김용의 주인공들이 아무런 고민없이 단지 영웅의 길을 매끄럽게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분명 김용을 잘못 읽은것이다. 김용이 묘사하는 주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불안과 고민에 내던져있으며, 모순과 결핍에 대한 욕망을(아버지나 여성 따위의 대상) 대상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바로 그 모순적 상황과 대면하는 인물이란게 리얼리즘적인건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그런의미에서 무협 전반의 누구보다 김용이 가장 급진적이고 레디컬하다고 생각한다.
7-정리
아래 어떤 우문에 의하면 단지 작가들 사이에 변별점만 있을뿐, 김용의 책 따윈 라면 냄비 받침으로 써야할 판이다. 하지만 아직 김용에게 더 배울 것이 남았다면 어쩔것인가? 김용이라는 위대한 작가를 뒤엎는건 그를 철저히 배우는것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한국에서 그런 기적은 나온바가 없지 않을까? 김용은 우리의 미래 시제, 즉 근대성에 갇힌 고루한 작가가 아니라, 선과 악의 구분이 단지 냉소로써 쿨하고, 시크한 메마른 세상에 읽힐 수록 거듭 새로워지는 신비한 마력을 가진 낯선 괴물이라 말하고 싶다..!
p.s:
셰익스피어와 김용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은원이 첫째요, 욕망의 주체를 그려내는게 둘째다. 셰익스피어가 응당 대접받아야하듯이, 언제까지라도 김용은 읽혀야되는게 아닌가? 무협 신도들이여? 우리는 김용이 아직도 읽힌다는 현실에 한탄할게 아니라, 점점 읽히지 않는 현실을 한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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