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전동조
작품명 : 묵향
출판사 : 스카이북
판타지, 무협을 쓰고 있다고 주변에 밝히고 살다보니 이런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 괜찮은 판타지 무협 추천 좀 해줘.
묵향, 비뢰도, 드래곤라자같은 건 다 읽었고."
기본으로 나오는 묵향. 사실 판타지 무협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름이다.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그 위명(威名)은 하늘을 찌른다. 아마 대한민국 5천만 인구 중에서 적어도 8백만 명 정도는 묵향을 알고있지 않을까?
현재 대한민국 20대~40대 초반에게 있어서 묵향은 보통 판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무협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써 현재 시장의 기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판타지 무협을 본다면서 묵향을 모른다고 하면 비웃음을 당할 정도다.
필자의 중고생 시절 농담으로 이런 얘길 할 정도였다.
전동조씨가 묵향으로 번 돈으로 강남에 아파트를 사놓고 놀고있을 거라고. 그 정도로 많이 팔렸을 거라고.
그렇다면 묵향은 왜 이렇게 유명할까?
왜 이렇게 많이 팔렸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시원시원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장르문학에 있어서 <재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이것은 문화 전반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저질적이고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한다고 비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안 팔리면 돈이 안 들어오는 데 어떻게 하나. 결국 쓰는 입장에서 울며겨자먹기로 작품성과 재미 둘을 모두 추구할 수밖에.
약간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지만 아무튼 묵향은 재미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당시까지의 무협은 구무협이라고 해서 내공갑자를 쌓고 무림영웅이 나타나서 도탄에 빠진 강호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틀에서 벗어난 작품도 있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묵향은 도리어 무림의 도탄을 <그래서 뭐?>라는 식으로 받아들인 데 의의가 있다. 묵향 무림편을 읽어보면 묵향이라든지 정사파의 고수들은 천하가 도탄에 빠졌느니, 천살성이 떠올랐느니, 무림영웅이 나타나야 한다느니 하지는 않는다. 무림의 싸움은 그냥 싸움일 뿐이다.
즉 공평한 시선으로 무림세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선악을 따지지 않고 중용적인 묵향의 가치관과도 결부된다. 치정이나 권문에 얽매이지 않고 살수 출신으로써 오로지 무(武) 한가지만 추구한 주인공. 그러면서도 세상에 이용당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세력을 이용하면서 자기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모습. 그것이 그때까지의 독자들에게는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대작의 풍모를 낳게 한 것이다.
일례로 묵향이 대학살을 벌일 때의 시점이나 묘사에서 느낄 수 있다. 묵향은 종종 피도 눈물도 없이 적을 말살하거나 죽여버리는데 거기에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문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뇌전검황을 죽인 거면 죽인 거다. 아무 죄도 없는 민초들이나, 그냥 명령을 따랐을 뿐인 고수들을 죽여 피의 강을 만들었으면 만든 거다.
보통 무협에서 학살씬이나 살인을 할 때 온갖 묘사나 여구를 곁들여 문학적 장치를 넣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동조씨의 필력이 그것까지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원시원하게 내용을 전개시키면서 자신을 배신한 마교에게 한방 먹이는 장면까지 가면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일이 구원(舊怨)을 넣으며 캐릭터를 등장시켰으면 작품성은 인정받았겠지만 이렇게 히트를 치지는 못했을 거다.
거기에 묵향의 쿨한 성격까지 합해지며 대리만족감을 증폭시켰다. 대개의 주인공은 기억을 찾는 순간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한중길에 대한 원한을 곱씹는 장면이 적어도 한 페이지 정도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어땠나?
황궁무공을 펼치며 기억을 찾으니 <아 젠장 배신당했네. 그럼 세력 모아서 한 방 먹여주마.>는 식으로 몇 줄의 대사처리를 하고는 곧장 이성적인 일처리에 들어갔다. 감상이나 문학적 장치에 빠질 시간따윈 없다는 태도다. 쿨하다면 무척 쿠울한 성격이랄까. 그게 더욱 묵향이란 캐릭터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묵향은 5권까지가 백미였다.
거기에서 좀 더 내용을 더 다듬어서 묵향을 13권 내외로 완결시켰다면, 아마 비뢰도는 커녕 드래곤 라자나 김용에 비견될 정도의 걸작(傑作)으로 각인되었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패착(敗着), 판타지 세계로의 이동.
나름대로 재밌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저히 나는 인정 못하겠다. 차라리 판타지 세계에서라도 무작정 휘젓고 다녔으면 모르겠지만, 다른 세계에 떨어지니 드래곤이니 정령이니 마왕이니 알 수 없는 것들한테 휘둘리면서 여자로 변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그때쯤 되니 묵향의 쿨한 성격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독자들은 상대에게 한 방 먹여주기를 원하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다보니 묵향도 기회를 보며 적에게 반격을 하게 된 것이다.
거칠 것 없는 무림지존에서 일개공국의 대공.
극적이라면 극적인 인생변화였지만 보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시원함도, 호쾌함도, 감동도, 흥미도,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글픔과 답답함이 마음을 채웠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랬다.
아르티어스란 캐릭터에 대해서는 따로 코멘트하지 않겠다.
내 상식으로는 판단 불가능하다.
지금 계속 나오고 있는 묵향에게 해줄 말?
다시 원래 세계로 건너와서 어설프게 역사를 집어넣으며 끝장난 캐릭터를 살려보려고 애쓰는 묵향에게 해줄 말 말인가?
헛소리꾼 시리즈의 우츠리기 가이스케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 너는 이미 사선(死線)을 넘어버렸고,
너에게 해줄 말은 한 마디도 없어.
건넬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건 위로의 말 뿐이야. '이미 늦었었나 봐', '유감이야', '불쌍하게도' 같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아서 생각해 주세요.
" 묵향은, 이미 아주 옛날, 아득한 옛날, 영겁의 과거에 종말을 맞았어. 끝나고, 끝나고, 끝난 상태. 다시 말해 막다른 골목이란 뜻이지.
스스로 깨닫고 있는지 어떤지, 자각적인지 무자각적인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그런 건 내 관점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그걸로 잘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행복이란 개념을 정의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 본인이며 작가 본인이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애독자들은 아마 뭐든지 받아들일 거야. 작가가 뭘 하더라도 용서하겠지. 작가가 애독자에게 충실한 것처럼 애독자들도 작가에 충실해. 그야말로 상사상애相思想愛.
다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가설이지만 작가가 묵향의 시간을 정지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로 인해 애독자들의 시간도 정지되어 버린 건 아닐까?
자신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정지시켜버린 자들에게 행복이란 건 아무런 의미도 있을 리가 없어. 정지는 순환되고, 나선이 되고, 그를 통해 묵향에 되돌아가지. 그렇게 되면 스스로 사멸하게 되지 않을까?
여기서 가공할만한 사실은, 애독자나 작가가 없어진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지. 일시정지에 불과했던 게 영겁의 정지로 변하는 것이지. 그런 것일 뿐이야.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사태는 악화되지.
두려운 일이야, 소름끼치는 일이지.
최선을 유지하려면 현 상태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최선은 최악일 뿐이고 차선책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까.
... 이미 끝나 있어. 애독자들도 끝나 있어.
이제부터 그들 모두는 앞으로 영원한 시간동안 끝나 가겠지. 그냥 끝나있는 게 아니라, 계속 끝나가는 거야. 잔혹하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어. 결말조차 보지 못한 채로 애독자는 묵향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작가는 애독자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끝나간다.
사실, 작가도 독자도 이제는 관성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2010/5/1 구로수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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