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검란의 '2세대 무협의 형성과 다양한 스타일로의 분화발전'이라는 글에서 2세대 무협이 비정무협과 실전무협의 틀을 깨뜨리고, 다양한 스타일로 분화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작품으로 장경의 '천산검로'를 꼽은 적이 있었다. 정말 기념비적 작품이 아닐 수 없다.(비정무협과 실전무협의 구분은 조금 애매하다. 이것의 구분 역시 언제나 그렇듯 다음 기회에.... ^^;;;)
장경의 천산검로는 1세대 무협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정한 강호상을 깨뜨리고 '정'으로 가득찬 강호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현재 잘 인식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지적되지 않고 있지만, 천산검로는 지금의 '무림질서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천산검로 이전에는 평범한 강호인들의 삶을 그려내지 않았고, 무림의 자세한 모습에 대해서도 그려내지 않았다.(못했었던 것일수도.... ^^;;)
천산검로 이전의 작품들은 언제나 싸움과 음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그 주위의 풍경이나, 무림의 구체적인 상이나 질서를 제시한 적이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천산검로 이전의 무협에서 무림이 '지도'라 한다면 천산검로 이후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정'이 넘치는 강호
천산검로에서 그려진 강호는 사문에 대한 애정, 동문들간의 정, 가족간의 정으로 넘쳐나는 작품이다. 그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그려지지 않았던 따뜻한 강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산검로의 따뜻한 강호에 주목하는 이유는 필자가 과문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읽어온 중국무협을 포함해 어떤 무협도, 부정적 감정이 아닌 인간의 정, 애정만으로 그려낸 작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산검로는 악역 서천래마백의 행위 근거마저, 추악한 욕망이 아닌 사랑때문이었다.
최근 임준욱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장경의 뒤를 이어 '정'이 넘치는 강호를 잘 그려내고 있지만, 장경의 천산검로 이전에 어떤 무협에도 '정'이는 넘치는 강호는 없었다. 특히 비정무협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시기에 나온 작품이라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2. 구대문파의 제자리 찾아주기
천산검로 이전의 '구대문파'는 말만 구대문파였다. 9개의 큰 문파라고 하면서 매번 사파에게 당하고, 강호를 지키는 신비문파보다 못한 존재였다. 내 기억 속에 9대문파와 관련된 작품으로서 9대문파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 작품은 단 두 개다. 사마달의 대소림사와 용대운의 권왕이다.
사마달의 대소림사는 사마달 특기인 용두사미의 하나로 기억되는데, 전반부는 소림은 역시 소림이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소림의 저력에 대해서 잘 다루다가, 갑자기 남자들의 우정이라는 괴상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기억된다.
그나마 용대운의 권왕은 소림사의 72종 절기에 상당한 비중을 두지만, 주인공은 소림사로부터 파문당하고, 백수권이라는 전설의 무공도 얻는 설정이어서, 전적으로 소림의 인물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72종 절예에 대한 것만을 비중있게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9대문파와 관련된 제목으로 야설록의 '대달마'와 '대무당파'가 있지만, 내용상 9대문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해도 무방할 정도 이다.(백상의 구대문파씨리즈는 논외로 하겠다. 읽어본 분들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한국무협은 9개의 대문파라고 하면서, 그들을 비중있게 다루지도 않았고, 매일 당하는 모습만 그려왔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왜 9대문파로 불리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 작품과 작가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천산검로는 한국무협 최초로 주인공을 '공동파'출신으로 설정한다. 9대문파 중에 하위권이지만, 어쨌든 9대문파다. ^^ 그리고 9대문파가 왜 9대문파인지 그들의 진정한 저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문도들의 사문에 대한 애정이었다. 자신을 거두어 주고, 가르침을 준 사문에 대한 정과 자부심, 유년기내내 함께 무공을 익히고, 생활하면서 싹튼 같은 동문간의 정. 이렇게 성장한 이들이 강호에 나가 서로를 이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형성된 인맥. 이것이 9대문파의 진정한 힘의 근원으로 제시한다.
3. 구대문파의 실질적인 힘 -속가와의 관계 정립
그리고 천산검로는 인화로 뭉쳐진 9대문파의 진정한 힘의 근원을 넘어서, 힘의 근원을 바탕으로 강호에 뿌리내린 9대문파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속가들이 세운 무관과 표국이다. 무관과 표국은 본산에서 무공을 배운 속가제자들이 그 무공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방법이자, '왜', 그리고 '어떻게' 9대문파가 속세 즉 강호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는가와 가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해명이자 자세한 설명이 된다.
이것 역시, 현재의 시점에서는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보아온 전혀 새롭지 않은 당연한 것이지만, 천산검로 이전에는 전혀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알 수도 없는 문제였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것 역시 천산검로에서 최초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
4. 전체적인 강호인의 삶의 모습을 그려냄
9대문파와 속가 즉 표국과 무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더 나아가 강호를 살아가는 평범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산검로 이전의 한국무협에서는 평범한 강호인들의 삶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없었다.
1세대 무협은 조연들 성격부여마저 제대로 못하는 판에, 평범한 강호인들의 삶을 그려낼 일이 어디있겠는가? 2세대 무협은 실전무협이 중요시되면서 '싸움'에 치중한다. 즉 등장인물은 '싸움'을 잘하는 인물이 된다. 즉 중심내용은 언제나 '초인들'만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극히 소수의 작품(대표적으로 대도오)을 제외하고는.
천하제일 혹은 특출난 무공을 지니지 못한, 일반 강호인들 특히, 정파인들 중 평범한 수준의 무공을 가진 이들은 큰 역할은 커녕 등장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해 자세히 다룬 내용은 없을 수 밖에 없다.
천산검로에서는 무공이 특출나게 높지 않은 북문호, 장홍 등 속가제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을 자세히 보여준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것도 같다. 장경 외에도 좌백, 임준욱같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평범한 강호인들의 삶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천산검로 이전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고, 천산검로가 그 시초라는 것이다.
한국무협이 나오기 시작한 이래 2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려서야 평범한 강호인들의 삶이 주목받고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 첫 작품이 천산검로라는 것이다.
소결. 비정무협을 넘어서
이처럼 천산검로는 한국무협의 발전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전의 무협이 저 하늘 높은 곳에서 강호를 내려다보면서, 특출나게 강한 초인들만의 이야기 였다면, 천산검로는 독자들의 시점을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삶과 강호를 자세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다.
그리고 평범한 강호인들의 삶을 그려내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싸움'이 주소재와 내용이 비정무협을 탈피하게 된다. 왜냐하면 평범한 무공을 가진 주제에 매일 혹은 자주 싸움질을 해되면 금방 죽게 되는 것은 뻔한만큼, 싸움보다는 그들의 삶의 모습에 더 많은 내용을 담아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자세히 그리면 그릴수록, 삶에 대한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끈끈한 정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배여들게 된다.
이처럼 천산검로는 사문에 대한 정, 동문들간의 정, 가족간의 정을 직접적인 주제로 했을 뿐만아니라, 평범한 무공을 지닌 속가제자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자연스럽게 평범한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끈끈한 정이 작품에 배여들었기 때문에 한국무협 최초로 작품 전체가 따뜻한 정으로 가득찬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천산검로에게 별을 다섯개나 준다. ^^
피에쑤. 왜 장경은 비정무협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제가 생각할 때는 정말 아이러니한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ㅡ.ㅡ;;
여러분의 생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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