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두샤
작품명 : 회색장미
출판사 : 문피아 연재중
편의상 평어로 씁니다.
내가 두샤라는 매력적인 글을 쓰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재나 책이 아니라 토론마당이었다. 일본문학과 한국문학의 문화적 우위에 관한 발제 토론에서 두샤님이 한국 문단을 이끌어가는(갈) 젊은 작가 몇 명을 거론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작가였다.(그 친구도 이미 마흔 줄에 접어들었으니 아주 젊다고만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았던 반가운 이름이 눈에 들어와 그 이름을 거론한 두샤라는 필명이 내 머릿속에 우연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우연히 연재한담에서 두샤님의 회색장미를 추천하는 글을 보고 구미가 당겨 읽게 되었다.
매력적인 글이다.
글을 간단히 간추려보면, ‘리얼리스트’인 주인공의 눈으로 ‘리얼’의 세계에서 좌절한 이들이 ‘갈망’이라는 판타지에 중독 되어 파멸해가면서 겪는 고통을 쫓아가는 내용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리얼’의 세계를 ‘고통’과 ‘좌절’이라는 것으로 등치시킨다.
“깨진 소주병을 왼 손에 들고는, 손등에 보이는 힘줄을 하나하나 자르기 시작“한 부친의 기대에 못 미쳐 좌절하는 재능 없는 화가. 혹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서 자신의 흉물, 못생긴 페니스를 꺼내 놓는” 남자친구를 가졌던 돈을 벌기 위해 원조교제 나선 여고생 등이 겪는 좌절의 단면을 꽤 사실적인 문체로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 방울방울은 아름다운 천상의 보석이” 되거나 “마치 저주처럼 오른손의 재능을 모두 먹어버린 왼손의 재능”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그녀의 아름다운 입이 조금 열리고, 새빨간 혀가 움직이며,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몽환적인 문체로 들려준다. 그런 다음 작가는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에서 우리는 이별을 선택했고, 그녀는 내 입술에 길게 키스”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작중인물들에게 ‘갈망충족’이라는 판타지를 부여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많은 미리니름을 포함한 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가가 희라는 반동인물을 통해 부여한 판타지는 그리 판타스틱한 것이 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작가는 “더 이상의 슬픔은 싫은데.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같은 말로 희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혹은 ‘회색장미’라는 제목으로 그 판타지의 한계를 독자들에게 미리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는 그 판타지의 한계를 여러 명의 ‘나’를 따라 가면서 확인하게 된다. 결국 등장인물들의 판타지는 더 없는 비극과 ‘리얼월드’에서 겪었던 것 보다 더 큰 좌절을 낳게 된다.
그것은 ‘갈망’과 ‘충족’이라는 둘 사이의 간극에 놓여진 그 어떤 것 때문인데, 주인공의 말로는 ‘반동’, 희의 말로는 ‘대가’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존재’와 ‘실재’라는 모호한(내가 느끼기에는) 설득으로 부여했던 판타지를 리얼리스트인 주인공을 통하여 부정함으로(소설에서는 존재와 실재라는 범주를 마련해 인정과 부정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두샤님이 쓴 것은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이므로.) 해체시키고 만다. 결국 희는 ‘갈망충족’이라는 또 다른 판타지의 일면이고, 회색장미는 판타지라는 이름의, 결국 부정되어야 하는, 팜므마탈일 뿐이다.
문체가 안정되어 있고 구성이 탄탄하다. ‘리얼리스트인 주인공이 왜 판타지 세계에 초대되었는가?’ 같은 의문을 던져 놓고(좀더 인상적으로 던져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긴 하다) 글을 읽는 동안 퍼즐을 맞추어가는 것 같은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적절한 생략이 있어서 좋았고, 적당한 절제가 있어서 흡족했다. 그리고 미제로 남겨진 몇 가지 복선이 있어서 이어질 다음 글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좀 더 개인적인 아쉬움을 담은 감상을 이야기 해보자.
글을 읽는 동안 머리를 몇 번 이나 갸우뚱거렸다. 작가가 제시하는 ‘리얼’과 내가 알고 있는 ‘리얼’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인공 성진이 리얼리스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진이 갈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과율이라는 리얼 세계의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성진이 말하는 리얼은 형이상학과 관념론의 리얼이다.
“인간의 인생이란 자신의 계급 안에서 최대한 생산과 소비, 목표와 달성이라는 반복적 메카니즘 속에서 성립” 된다거나, “이래서야 유물론자들의 이야기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머리를 맞았다고 생각이 제대로 들지 않는다니.”라거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세계를 인식한다. 그것으로 세계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생각하는 리얼과 내가 생각하는 리얼은 애초에 다른 것이었구나!
이것은 좀 더 본원적인 문제이다. 즉 작가와 내가 가진 세계관(여기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장르문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작가가 소설의 배경으로 삼는 일정한 가상 시간이나 공간을 지칭하는 말과 확연히 다른 개념이다. 이점에서 나는 장르‘문학’이 왜 신념과 근거도 없이 인문학에 대한 끔찍한 테러를 일삼는 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의 차이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뭐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것은 마치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라온 권투선수에게 벨트 아래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내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 만한 단서를 처음부터 던져 주었다.
주인공은 소년시절 “그럴 리가 없잖아” 하면서 동화를 내던지고 새로운 책을 꺼내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통해 재조명하는 자본론의 현대적 의미’ 꽤 긴 제목의 책이다. 당장 내 책장에 꽂혀있는 ‘맑스를 넘어선 맔스’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와 같은 것과 비슷한 뉘앙스의 책이다. 맑스 엥겔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리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맑스 엥겔스는 당연히 리얼리스트이다. 그 리얼은 관념론과 현격하게 대비되는(아니 관념론을 철저히 부정 지양하는)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이라는 리얼리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존재와 실재라는 판타지와 리얼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명하는 작가가 제시하는 범주에 대해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고, 앞선 이런 말들을 통하여 작가가 제시하는 리얼을 습득하기 전에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주인공은 세계평화라는 갈망을 이야기 했는데, 희는 그것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이야기의 결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평화를 갈망하는 많은 리얼리스트를 알고 있다. 보통 활동가, 실천가, 운동가 혹은 (과격하게는)혁명가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작가가 말하는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가치”인 세계평화와 당파적이고 실천적 가치인 세계평화의 간극이 ‘이야기의 결말’이라는 모호한 결론에 동의할 수 없게 하고 계속 의구심을 품은 채 글을 읽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작가는 모든 것을 회의해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존재의 단초를 만들어 낸 데카르트를 끌어들이고 또 거기에서 ‘여기’와 ‘지금’을 세계의 기초로 삼는다. 그러나 내가 가지는 리얼은 거기서 존재와 인식을 한 번 더 뒤집어 사회와 역사라는 것을 기초로 삼는 당파적 세계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지레짐작으로 주인공이 말하는 리얼이라는 세계관과 나의 리얼이라는 세계관을 동일시하는 헛물을 켠 셈이다. 그러면서 글을 읽는 내내 해소되지 않는 의문에 사로잡혔고.
그렇다면 작가가 글을 시작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던진 떡밥에 넘어가서 혼자 헤맸던지, 아니면 작가가 잘못된 소설적 장치를 사용한 것이다. 나 같은 떡밥에 넘어갈 우려가 있는 독자를 위해 좀 더 친절했어야 한다고 본다. 희가 동화 작가였고 또 동화라는 화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갈망충족 이라는 판타지를 유혹하는 것으로 그리려 했다면 말이다. 주인공이 동화를 젖혀두고 뽑아든 것이 판타지와 구분되는 리얼이라는 것을 관통하는 장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많이 아쉽다.
회색장미의 미덕은, 내 생각에, 앞서 말했듯이 안정적인 문체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연재 편편 사이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회차의 글은 아주 정갈한데 어떤 것은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것은 텍스트를 비교해 가면서 이야기를 해야 될 문제인데, 앞의 글이 너무 길어져서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말로 이야기한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를 더 꼬집자면, 작중 희나 연아는 추상적인 묘사를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남자가 줄줄 따랐던 리얼 세계에 속했던 연희의 아름다움은 좀 더 리얼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사소한 푸념은 “나로 말하자면” 같은 공지영식 어투 같은 것이 가끔 나와서 글을 읽다가 눈에 밟혀서 조금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두샤’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다른 연재 글도 있던데, 선작을 해놓고는 아직 못 읽고 있습니다. 그 글역시 회색의 장미만큼 매력적인 글이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두샤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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