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존칭어 생략합니다 ^^ 양해해주시길)
우리는 각자 무협소설에서 느끼는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매력 때문에 책을 읽는다.
대리만족을 느끼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읽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그냥 편안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모두를 해결하기 위해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협소설 읽는 것이 본업이 아닌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본업에 충실하면서
또는 본업에 충실하기 위한 활력을 얻기 위해서 각자의 취향이나 어떤 목적하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무협소설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떤 무협소설이 나를 빠져들게 하는가?
나 역시 일상의 스트레스를 무협을 통해서 해소하기도 하고
실제생활에서는 실행하기 힘든 주인공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나 자신을
새로이 정화하기도 한다.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여주는 무협소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뭔가 2%가 부족한 것이다.
그 부족한 2%가 그 책 속에 들어가 있지 않는한 나는 결코 그 책을 휼륭한 작품이라
하지는 않는다.
곧 철학을 얘기하고자 함이다.
철학이 들어 있지 않은 무협도 좋아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휼륭한 소설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그 2%는 단순히 약간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핵심이요 골수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작품은 곧 뇌가 없는 인간과 같으며, 용을 그리면서 마지막으로
눈알을 그리지 않은 체 완성된 작품으로 떠벌리는 것과 같다.
철학이 들어있는 작품 또는 철학적 문제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작품이란 무얼
말하는가?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을 투영시킨 작품이라 스스로 정의한다.
시간과 장소가 오늘날과 다르고 더우기 "강호"라는가공의 세계 속에서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역시 현실의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즉 밥먹고 똥사는 동물 본능에 포함되어 있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본성과 그런 본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한 차원 높은 가치관과의
간격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주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스스로 -의식하든 무의식적이든- 매일 매일 그런 욕망과
부딪치는 가치관과의 차이 때문에 겪는 갈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여
주는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주제의 작품으로 나는 한상운의 비정강호를 보았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의문에 쌓인 한 세가의 비극에 차음 접근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그 추리소설적 기법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어서 그 비극을 조장한 사람이 실제로
누군지를 작가가 보여주기전까지 알 지를 못하였다.
흔히, 공포나 추리의 기법에서는 범인의 정체를 작가가 밝히기 전까지는 온갖
수단을 써서 그를 베일에 묻혀두곤 하지만
"범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나름대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용의선상에 올리놓고 따져볼 수도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나는 완전히 그 부분에서 손을 놓아야 했다.
작가의 한마디 말에 100% 맹신을 하였기 때문인 데, 즉 범인을 가르키는 "그"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는 남성인칭 대명사라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남성만을 내 머리속의 용의선상에 올려두었던 절대적 우를 범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란 대명사는 남성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를 아우를 때도 쓰여지는 단어임을 깜박했던 것이다.
나의 선입견 내지 고정관념에 내가 스스로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작가는 그것을 노렸던 것이고.
그래서 이 소설은 끝까지 흥미진진하였고,
작가에게 우롱당한 만큼 기분이 더욱 상승되었다.
이 작가의 심리묘사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나는 여태것 내가 본 무협소설중에서 이 작가처럼 가감없이 인간본성의 핵심을
찌르는 심리묘사를 한 작품을 본 기억이 없다.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한마디로 억지로 독자를 이해시켜려 들지
않으면서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인간의 심리를 해부하여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작가의 전공분야가 인간심리해부학(그런 전공이 있나?
심리학과라면 몰라도...단순히 심리학을 전공하였다는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
같으니...^^)이 아닌지 무척 궁금스러워졌다.
그로인해 독자인 저로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모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바람난 여자가 남자 가자는 대로 고개 끄덕이며 따라가듯이...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설득력도 있고 뛰어난 문장력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비정강호라 하였다.
비정이 판치는 것이 어찌 강호뿐이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비정이 판치지 않는가.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혹은 더 가지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면,
못가진 자는 가진 자로부터 뺏어내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쓰곤 한다.
못가진 자는 생존에 대한 욕망으로,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욕망으로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는 것이다.
배신을 하는 것도 사기를 치는 것도 사람을 협박하는 것도 그런 욕망의 한 표현일
뿐이다.
그런 것을 풍생이나 심선생이 보여준다. 아니 그 책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이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까지도...
그런 세계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인 것이다.
작가는 강호 또는 무협이란 세계 -식자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그런 허구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강호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인간이란 욕망 덩어리로 뭉쳐진 존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그 찌꺼기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의 마지막에 심선생을 말한 대목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고, 여동생을 구하러
떠나는 마지막 행동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욕망에 철저히 굴복하고 있는 심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홍장훈의 마지막 사고 -말은 사고의 표현일 뿐이다-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낸 것이고,
그런 행동이야말로 사고는 하되 행동하기 힘들다는 일반적 명제를 깨부수고
욕망의 세계로부터 한 차원 높은 세계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스스로가 철저히 경험하고 고뇌하다가 마침내 나름대로의 삶의 가치관을
스스로 확립하고 그 확립된 세계로 뛰어드는 것은
절대적 신의 존재에 의지하면서 자기의 고뇌를 벗는 톨스토이의 부활의 주인공
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족- 책 표지가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책의 가치를
깍아 먹는 것으로 보였다. 차라리 디자인 없이 백지로 하든지 아니면 책의
내용에 걸맞게 디자인 하든지...마치 커다란 성인의 몸에 알룩달룩한 아기 옷을
입혀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하여튼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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