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과 불의 노래는 미국의 작가 George R. R. Martin이 쓴 판타지입니다. 1996년에 1부가 나와서 지금까지 3부 (...)까지 나왔구요, 7부 완결이 예상인 작품입니다. 이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전체 판타지 베스트 셀러 목록에 항상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인데 (1위는 지난 15년간 전부 9권이 나온 시간의 수레바퀴 시리즈 (The Wheel of Time)),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도 않고 별로 인기로 없는 것 같아 감상겸 소개겸 추천겸 해서 글을 올립니다.
얼음과 불의 노래 (이하 얼음불)의 시작은 무언가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어딘가 신비롭지만 그렇다고 마법이 나온 것도 아니고, 공포스러운 감도 있는 듯하지만 드러내놓고 악령이나 괴기스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서장 이후로 벌어지는 일들은 맨 앞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타 판타지에서는 흔하디 흔한 마법사니 9 써클, 혹은 엘프나 드워프 같은 건 하나도 등장하지 않고, 차라리 어떤 역사물을 보는 듯한 치밀한 설정과 현실적인 구성으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얼음불의 세계는 일단 방대합니다. 등장 인물들의 주 무대는 웨스테로스라는 대륙인데, 그 외에도 바다 너머로 여러 다른 땅과 나라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스테로스는 또한 세븐 킹덤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야기는 웨스테로스의 국왕인 로버트 바라테온이 차디찬 북부의 지배자이며 자신의 친구인 에다드 스타크 영주를 방문하면서 시작합니다. 때는 왕국의 수상 격인 왕의 핸드 존 아린이 병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고, 에다드 스타크는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그의 대부이기도 했던 존 아린이 독살당했다는 의문을 품고 친구 로버트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와 함께 남부로 떠나게 됩니다. 그 후로 여러 사건이 일어나고,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그 밑에 아직도 여러 불안 요소가 남아있던 세븐 킹덤은 로버트 바라테온 왕의 죽음을 계기로 사태가 것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결국 곳곳에서 전화 (戰火)가 일어나게 됩니다.
얼음불에는 뚜렷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일단 전개 자체가 단순히 한 챕터 한 챕터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챕터마다 등장 인물 중 한 명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풀어나가기 때문입니다. 1부의 주인공은 아마 네드 (에다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독특한 인물들이 나오지요. 충직하고 명예롭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는 네드, 가문과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는 용감한 여인 캐틀린 스타크, 그런 캐틀린에게 남편이 데려온 사생아라는 이유로 냉대를 받아온 존 스노우, 노래를 즐기고 동화 속의 왕자님과 화려한 왕궁의 삶을 꿈꾸는 스타크가의 장녀 산사, 천방지축인 여동생 아리아, 지혜롭지만 난장이인 까닭에 자기의 부친에게까지 천대와 무시를 당하며 자란 티리온 라니스터, 그리고 고아면서도 전대 왕조의 마지막 남은 자손으로서 부왕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야만인에게 팔려가는 공주 대너리스 타르가르옌... 제가 그다지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나, 이처럼 가지각색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모두 다양하게 묘사된 작품은 제가 읽은 판타지/무협 중에는 아마 얼음불이 최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러한 전개를 못 마땅해 하는 분들고 계시겠지만.
서구에서는 얼음불을 흔히 '12인의 시이저'나 '장미의 전쟁' (중세 잉글랜드의 랑카스터와 요크 가문이 수십년이나 대립한 이야기)와 비교하곤 합니다. '12인의 시이저'의 실제 역사에 못지 않게 모략과 암투가 만연하고, '장미의 전쟁'에 못지 않게 중세의 세력 다툼이나 배경, 역사 등을 뛰어나게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얼음불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 이미 언급했 듯이 마법이나 고리타분한 타종족은 없지만, 어떤 신비함이 밑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고대에 웨스테로스 전역을 휩쓸었다는 기이한 불사의 괴물 '아더들', 그에 맞서기 위해 지어진 수백 미터 높이에 수천 리 북부를 완전히 횡단하는 얼음과 돌의 장벽 '월(the Wall)', 남부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북부에는 거의 원시 그대로 남아있는, 몸통에 얼굴이 새겨진 나무들의 숲, 그리고... 드래곤들도.
최근에 나오는 양산 판타지에 질려 다른 종류의 작품을 접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얼음과 불의 노래를 적극 추천합니다. 다만 문제라면 책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고, 지난 8년 간 3부가 나왔지만 한국에는 2부까지밖에 번역 출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국내판은 1부당 4권이네요)... 그리고 번역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는 글도 있지만... 그럼에도 최고 수준의 판타지를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는 이 작품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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