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장익.
작품명 : 풍진기.
출판사 : 정연.
仁兄에게 드리는 글.
仁兄.
갑자기, 아니 마음먹고 무엇을(?) 준비하는 중인데 뜻대로 나가주지 않아서 잠시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읽을거리를 찾던 중 꼭 사고 싶은 글을 찾았으나 11월 어느 날부터 중단 되어 있기에 이 글을 드립니다.
仁兄. 자신 있게 권해드리고 싶군요. 형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서 춘절을 앞두고 멈춰버린 ‘고근명’ 이라는 청년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仁兄.
.......대뜸 콧대를 비틀어 핑 소리와 함께 허연 콧물을 풀어내며....... 그리곤 경망스럽게 괴춤을 추스른 다음 침을 뱉고 싹싹 비빈 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가르마 탓다. 제 딴엔 동냥질을 하여도 이왕이면 깨끗함을 보이는 게 좋을 거란 뜻이었다. 하지만 쑤셔댈수록 냄새나는 것이 똥이라고, 몸 전체가 오물투성이인 고근명은 그렇게 몸단장을 부릴수록 땟물이 번져 외려 더 추레해졌다.
仁兄. 저는 여기에서 ‘리얼리티’에 대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란 원리적으로 간접화(타자의 모방, 욕망의 삼각형식, 현상학)라고들 하는데 그 궁극은 어디일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도 잠겨 봤습니다. 이 다음 연결부분은 직접 읽으시라고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仁兄.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버둥거린다. 새는 신을 향해서 날개를 펼친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다.’ 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짧은 글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보이더군요.
‘진주 목걸이’ ‘비게 덩어리’등의 명작으로 명성을 얻은 ‘모파상’의 스승으로 알려진 ‘보바리 부인’의 작가 ‘플로베르’가 일물 일어설(一物 一語說)을 주장했다고 하지요. 그 장면, 그 문장에 어울리는 딱 하나뿐인 단어,
仁兄.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거의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답을 한다더군요.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소통. 작가는 자신의 글로 스스로와 소통하고 또 글을 통해서 독자와 소통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쓴다고 해야 하겠지요.
‘춘절’을 맞아서 내건 등불들이 각자 뽐내고 있는 황도의 거리에서 걸음을 멈춰버린 ‘고근명’
혹, 원하는 만큼의 소통(독자와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씩씩한 청년이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나 아닌지,
仁兄.
저는 이 책을 하루 빨리 사서 습작을 하고 있는 내일(?)에게 (사실은 제가 먼저 읽은 후에) 선물을 할 예정인데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의 따뜻한 손과 저의 기도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청년이 씩씩하게 나갈 수 있다면 저는 매우 행복 할 것 같군요.
仁兄
저는 지금 문학, 소설에서 말하는 의도(intend)에 대한 생각과 지향성(intentionality) 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仁兄. 제가 꼭 사고 싶은 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책까지만 소개하기 위해서 글을 올릴 것이니 용서하십시오. 저도 이달 말까지 약속된 것을 마무리 지어야하기에 당분간은 형과의 대화가 어렵겠지만 잠이 도망 가버리고 생각이 멈춰버린 틈이 생기면 바로 세 번째 글을 드리겠습니다. 이 밤 좋은 꿈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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