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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대한 대 착각.
仁兄.
저는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던 중 한 사람의 특정인을 위한듯해 보이는 란에 다른 한 사람의 글이 실려 있고 비교적 우호적인 댓글이 많이 달려 있기에 세 번을 거듭 읽어본 후 이글을 무림 동도들에게 드리고 싶어서 올립니다.
한마디로 놀라울 정도의 신공을 지닌 분이 뇌성벽력 같은 일갈을 내 지르더군요.
그 일갈의 내용은
[독자에게 비평의 자유는 있을 수 있으나 권리는 없다.]는 요지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일갈의 논거를 조금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누가 감히 문학을 평가 할 것인가?’ 라고 일갈하며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shaw George Bernard의 일화를 이야기 하고 있더군요.
예. 仁兄.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 ‘버나드 쇼’가 아니라 ‘카프카’ 나 ‘까뮈’ 가 말했을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사견일 뿐이라는 점.
둘. 그런 ‘버나드 쇼’도 미술, 음악, 연극뿐만 아니라 사회 비평가로 활동했다는 점.
마치 주자가 제자들에게는 관로(官路)는 천한 것이니 오직 학문에 전념하라고 한 후 자기 아들의 벼슬자리를 위해 동분서주 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셋. 어떤 개인이나 혹은 상당수의 무리가 비평을 없앨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 점.
넷. 그분이 스스로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그 이후에도 비평은 학문, 문학의 한 분야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
다섯. 열 개의 문학박사 학위를 갖고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적임자가 있다 해도 그가 처음의 평론을 발표해서 인정받기 전에는 독자에 불과 하다는 사실. 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섯. 현재까지 비평가의 조건이 자격증 시대가 아니라는 점. 또한 간과 할 수는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즉 모든 독자에게는, 상품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자에게 평가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비평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며 논리적일 것입니다.
그는 계속 열변을 토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비평의 권리가 독자에게 있다고 하는데 ‘착각도 이정도면 대 착각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비평은 ’독자‘의 권리가 아니다. 책을 읽는 독자의 권리는 감상문이나 독서일기가 다다.
(중략)
‘비평에는 권리가 없다. 버나드 쇼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버나드 쇼는 ’문학을 평가 할 수 있는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누가 감히 문학을 평가 할 것인가?‘ 라고 일갈하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라고 쓰고 있군요.
저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 저는 버나드 쇼에게 묻고 싶군요. 당신이 한 음악, 미술, 연극, 사회비평 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냐? 라고요.
둘.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 하느냐? 라고요.
그리고 이 글을 쓴 이는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비평을 하려면 비평의 자격을 갖춘 비평을 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비평가가 되는 것은 비평가의 자격요건 이라는 것이다.
저는 여기에서도 단어의 선택에서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봅니다. 바로 자격이라는 단어이지요. 만약 이 단어가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면 100%로 동의 하겠지만 기준이 명확히 서 있거나 자격증이 요구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날카로운 논지와 태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경의를 표하고 있지만 그 논리에는 수긍을 할 수가 없기에 이어봅니다.
仁兄.
이분은 또 말합니다. ‘한 작품 혹은 작가의 생사여탈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 비평이다.’ 라고 단언하고 있군요. 생사? 삶과 죽음이라는 뜻이 맞나요?
‘순문학과 키치문학(무협/판타지/ 만화)과 비교하며 비평의 타당성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하여 그들은 비평의 타당성만 말하는가? 순문학에서 이루어지는 비평가의 엄밀함, 비평가의 엄청난 비평 전문 소양에 대해서는 어찌해서 말하지 않는가?
참으로 새길만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있군요.
즉, (고무림에서 비평 활동을 하거나 온전한 비평의 자유를 원하는 분들에게 하는 소리 같은데) 이 ( )안의 분들이 엄밀함이나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은 비록 상당한 개연성을 갖고 있으나 추론일 뿐 그렇다는 식으로 단정해서 정의한다는 것은 좀 벗어난 자세인 듯 해 보이는군요.
‘순문학의 대가들도 비평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맞다.(그러나 겸허히 받아들이는 대가는 단 한 명도 없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문득 두 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나. 언제 누가 전 세계의 순문학(저는 솔직히 말해서 전 세계에 몇 편 정도의 순문학 작품이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대가들의 양심, 혹은 머리를 열어봤을까? 하는 의문과
둘. 그런 엄청난 대 사건이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키치-문학을 무협이라고 본다. (중략)
‘서울대 중문학과 유경철씨가 (김용 무협소설의 상상-사상의 오자 인 듯 합니다.-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또한 비평은 비평이되 한국의 무협과는 별개인 논문일 뿐이다.
위의 이야기는 한국무협에 비평이 없었다는 말끝에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문제가 내포 되어 있군요.
즉 다음 이야기를 이어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무협 소설에 관한 비평이 전무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한국의 경우 이론적 비평을 습득한 비평가일지라도 실제적 비평에 필요한 한국의 무협소설(혹은 무협소설 작가)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비평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문제 하나. 과연 한국에 소설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작품이 몇 편이나 있는가?
둘. 한국 무협소설, 작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논리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셋. 두 번째의 항목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어느 정도의 별도 연구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문득 작품은 오직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유명 평론가의 주장과 그 대척점에 서서 현장(작가 및 주변) 평가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떠오르는 부분이군요.
‘둘째. 문학이 권력화 되어버린 마당에서 키치소설(무협/판타지/만화)은 문학의 주류에 합류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버렸다. 요즘의 비평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례사 비평이라고 말한다. 요즘의 비평가는 이미 비평의 정신을 상실한지 오래다.
역시 조금은 위험한 단정이군요.
‘밥을 굶지 않으려고 그들은 열심히 주류에 편승 할 수밖에 없다.
역시 매우 위험하고도 단정적인 어조군요.
‘(이론과 실제를 모두 갖춘 비평가에게) 무협소설이 제대로 된 비평을 얻는다? 심히 억울하지만 한마디로 꿈도 못 꿀 일이다.
저는 이부분에서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작가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도를 갖춘 소설을 써 놓고 난 이후 말하자.
둘. 우리 독자들도 스스로의 수준을 높여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써 내는 작가만이 성공하는 풍토를 만들어 놓고 난 이후 말하자. 라는 것입니다.
이분의 열정과 용기에 거듭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개연성만 가지고 단정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仁兄.
잘 아시겠지만 단테의 신곡이나 ‘데카 메론(맞나요?)을 현대 소설의 시작으로 배웠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나. 예술, 소설이란 그 이론이 생기기전부터 인간의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둘. 비평의 틀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비평은 존재했다.
셋. 지금 현재까지 비평은 자격증을 요구하는 분야가 아니다. 라는 사실에 동의 하십니
까?
‘비평은 작가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평은 평론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양을 필요로 한다.’ 는 그분의 결어에 100%로 공감 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추신: 저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제가 장시간에 걸쳐서 이글을 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잘못된 논거나 단정, 인용, 결론 등으로 진실(혹은) 어떤 이론이 잘못 인식 되거나 고착화하는 것을 막고 싶어서일 뿐입니다. 제가 인용한 글을 쓰신 분 혹여 불쾌한 부분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장르문학, 그 발전을 열망하는 한 사람의 작은 몸짓으로 감싸주시기를 바라며 님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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