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문재천의 <호접락어수상>에 추천사로 써준 글인데, 추천 부분을 빼버려도 몇몇 읽을만한 구석이 있는 듯해서 여기 올립니다. 추천 부분은 빼고 일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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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무협작가.
무협 작가는 하나 하나의 작품들을 잘 쓰면서, 또 빨리 쓸 것을 요구받는다. 통상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해결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것은 글 쓰는 이로서의 내적 욕구와 의무감 때문에, 뒤의 것은 무협시장이라는 이 도깨비 시장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성의껏 썼건 날렸건, 잘 썼건 못 썼건 짧은 시간에 많이 내는 사람이 잘 팔리는 작가가 된다는 등식이 성립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협이라는 장르의 외피는 두텁고 단단해서 어지간한 망치로는 두들겨도 금 하나 가지 않는다. 한편 무협의 내적 세계는 깊고 방대해서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미지의 안개만 앞을 가릴뿐 실체라고 할만한 건더기가 잡히지 않는다. 그런 장르 속을 헤엄치는 무협작가는 장르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그 장르의 외피를 두들겨 부수고 나올 것을 요구받는다. 어려운 이야기다. 통상 인간의 법칙에 따르자면 무엇을 부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안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창조를 위한 파괴,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본질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 없이 이루어진 파괴행위는 우연이거나, 실수 중 하나로 치부된다.
또한 무협작가는 더 광범위한 독자층을 위해 충분히 쉬운, 하향평준화된 글을 쓸 것을 요구받으면서 동시에 수준 높은 독자의 지적 만족감과 감성적 카타르시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충분히 고양된 작품을 쓸 것을 요구받는다. 무협작가는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야 한다. 낯익지 않으면 생경해서 버림받게 되고, 새롭지 않으면 지겨워서 던져지기 때문이다.
무협은 하나의 전문적인 장르이기도 하기 때문에, 내공(內功), 경공(輕功)과 같이 이미 널리 퍼진 용어들 말고도 삼화취정(三花聚頂)과 오기조원(五氣造元), 능공허도(凌空虛渡)와 만천화우(滿天花雨)같은 일반에게는 생경하고, 중국집 짜장면 냄새 나는 단어들을 사용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 생경한 단어들로 일반에게 이해되는 글을 써야한다. 오랜 무협독자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독자들을 포섭해야 하는데, 충분히 전문적이면서, 충분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어야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무협작가는 쉽게 읽히고 고민스럽게 만들지 않는 훌륭한 시간 때우기 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면서, 동시에 서가에 꽂혀서 오래오래 읽히고 기억되기를 원하는, 그런 글을 쓸 것을 요구받는다.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쉬우면서 의미 있고, 재미있으면서 오래 기억되는 글을 쓰고 싶은 것, 훌륭한 글을 빨리 써내고 싶은 것, 장르의 본질 속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가서 전문적인 수단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 하나의 장르를 파괴하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는 창조와 파괴의 순간이 자기 손에 쥐어지게 되는 것은 비단 무협작가 뿐 아니라 창작 활동을 하는 그 누구든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 모든 작가가 그것을 목표로 뛴다고 해도 성취하는 사람은 혜택 받은 천재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대부분의 작가들은 단지 노력만으로 그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좋게 봐주어도 결국은 가능성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 가능성 마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구별되는 것이니, 나는 단지 그런 사람을 부러워만 하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적다고 해도 목표조차 작게 잡을 순 없다. 오늘 안 된다고 내일도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니 아래 같은 이야기를 주문처럼 외워보는 것이다.
자유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억압을 느끼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무협이라는 언뜻 쉬운 듯 보여도 한없이 어려운, 만만해 보여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장르의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그 안에 인간과, 그 삶의 보편적 가치들을 표현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무협이 무협이고자 노력하여 버린 많은 것들 중에 사실은 결코 버려서는 안되는 그 무엇, 많은 사람이 잊고자 하여 몸부림쳐도 결국은 잊어서는 안될 그 어떤 것, 그리하여 결국엔 모든 것이 이것으로 모여지는 그 무엇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대중을 위해 글을 쓰지만 대중을 따라가선 안되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있긴 하지만 다른 작가가 간 길을 쫓아가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걷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것이 진짜 작가이기 때문이다.
무협이라는 이름으로 얻게 되는 많은 이득 뒤로 따라오는, 역시 무협이라는 이름으로 씌워지는 굴레를 용감하게 벗어 던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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