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뛰어난 데뷔작 두 편을 꼽자면 흔히 좌백 [대도오] 운곡 [등선협로] 를 꼽을 것 같다. 이 두 작품 못지 않게 뛰어난 작품이 [진가소전]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대도오이고 수십번 읽었다. 그러나 대도오의 매력을 느낀 것은 군대를 다녀오고 성격이 변한 후 부터였다. 요즘은 읽을 수록 더 맛있다. 운곡의 등선협로는 무협사상 초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과 견줄 수 있는 작품은 예전에 신무협 붐이 읽었을 때 뫼에서 나온 [노자무어] 뿐이다. 등선협로는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고 또 몇 번 읽기도 했지만 매력이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점점 나를 사로잡는 마력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도오와의 차이점이라면 둘 다 훌륭하지만, 화장실을 가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기차/버스안에서 내 손이 가는 것은 대도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가장 많이 읽은 건 진가소전이다. 무협을 즐기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신인작가가 너무 뛰어난 작품을 쓸 경우(천사지인이 한참 출간될때 이야기다) 혹시 'XXX 작가 공장 출신이 아닐까?' 류의 호기심. 모두 천사지인의 작가가 결코 이 천사지인이 처음 쓴 작품이 아닐꺼라고 말할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천사지인? 흥! 처녀작이면서 처녀작같지 않은 작품은 진가소전이 단연 압권이야!'
왜 진가소전에 그렇게 몰입했을까?
의학, 토목공학, 공예의 매력.
백련교도들이 주는 비장함.
압도적인 주인공의 무예.
조연들의 개성.
무리없는 등장인물들과 줄거리.
편하게 읽히는 문장.
거부감없는 적들.
임준욱 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이 한편에 다 나타난다.
그리고 이 임준욱이라는 작가를 읽으면서 내가 쓰고 싶은 무협이 비로서
세상에 나왔다는 기쁨, 안타까움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것보다 훌륭해서 기뻤고, 내가 쓰기전에 나와버려서안타까웠다.
타고나기를 얍삽하고 간사한 주인공을 싫어하는지라, 친구들이 모두 녹정기가
김용작품중에서 최고라고 말할때도 곽정을 옹호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양과에 관심이 갔다가 결국 영호충을 가장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임준욱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악인일지라도 악하지 않다.
그러니까 다른 무협을 읽을때 느끼는 어떤 거부감, 심할 경우 욕지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임준욱 무협은 '착한 소설' 이라서 그런 거부감이 거의 들지
않는다.
진가소전에서 손재간있고, 바지런한 주인공을 그렸고
농풍답정록에서 과장이 별로 없는 무공을 묘사하면서도 훌륭하게 강호인으로
자라는 젊은 무사를 그렸다.
건곤불이기에서는 평범한 이가 어떻게 무사로 변하는지를, 강호와
시정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보여주었고
촌검무인에서는 무림문파의 비극과 날개를 펼치지 못한 무사의 애증을
그렸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 작품들이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지겨워보일수도
있고, 착한 소설이다 보니 죽을 먹는 듯 큰 묘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무협의 자극보다 10% 정도의 자극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자극은 기분을 좋게 하는 자극이다.
세상사가 어디 임준욱 소설마냥 그렇게 순리대로 풀리겠느냐마는
유혈낭자하고 사지절단이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져있는 무협보다는 훨씬
좋다.
괴선 1권은 무협사상 가장 처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작가가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 같아 기쁘다.
^^
언젠가는 '동사서독'같은 분위기의 무협이 나왔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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