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르소설에만 해당됩니다. 영화나 일반 소설과 다르게 장르소설은 읽기 전 독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기대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0. 시련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동료의 배신을 당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거나, 내공이 전폐당하거나, 기경팔맥이 막혀버린다거나, 어떠한 요인에 의해 정상인과 다른 저하된 능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좀 더 범위를 확장하면, 부모님이 살해당하거나 여자친구가 강간을 당하거나 동료가 암수에 당해 죽거나 주인공이 속한 문파가 멸문당하는 등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위기에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련들은 소설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시련과 마주하지 않는 주인공은 없으며 작가는 이와 같은 시련을 적절히 이용하여 이야기에 속도감을 붙이고 몰입하게 만들며 독자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련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련은 소설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시련은 독자가 소설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 논란이 된 진호전기가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불쾌감의 원인을 논하면서 ‘강간’이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어긋났다거나 개연성이 모자랐다거나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재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조절변수에 불과합니다.
강간은 구무협 뿐만 아니라 신무협에서도 많이 다루어졌으며 한 때는 소설마다 색마가 한 명씩은 꼭 등장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현실에서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강간을 당한 여자가 강간범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불쾌한 상황도 감정에 불을 더 지피는 매개변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나 아내 혹은 자식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것에 대한 복수극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들도 있습니다. 영화로 따지면 쏘우로 유명한 제임스 왕의 데쓰센텐스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똑같이 지인이 강간을 당하는 시련이, 어떤 소설에선 독자가 더욱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지만 왜 또 다른 소설에선 소설을 더 이상 읽기 싫어지게 만드는 것일까요?
1. 시련의 두 차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둘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가 있습니다.
시련에는 두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제부터 전자를 ‘고난’, 후자는 ‘농락’이라 표현하겠습니다. 이 둘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쉽습니다. 독자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을 보면 됩니다.
‘고난’의 경우엔 독자의 분노가 시련을 일으킨 원인을 향합니다. 즉 악(惡)을 향해 분노합니다.
그러나 ‘농락’의 경우엔 독자의 분노가 주인공을 향합니다. 즉 주인공에게 화를 냅니다. 혹은 시련을 당한 히로인에게 분노를 터트리기도 합니다.
즉 분노의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처럼 ‘농락’에 속한 시련을 지켜보는 독자는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거기에 당한 사람에게 분노하기를 선택합니다. 어떤 면에선 놀라울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경우는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둘은 독자가 소설을 읽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무시무시한 차이를 낳습니다. ‘고난’은 주인공에게 동조하게 만들지만, ‘농락’은 주인공이나 히로인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축인 만큼 독자가 주인공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곧 소설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즉 소설을 싫어하게 됩니다.
‘고난’이 옳고 ‘농락’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은 둘 다 옳습니다. 작가의 선택이며 설정이며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고난’과 ‘농락’이 독자에게 각기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지는 반드시 안 상태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위와 같은 차이를 간과하여 독자의 취향과 척을 지는 경우가 있는데 설정이야 작가의 마음이지만 독자가 책을 도중에 덮는 것은 독자에게 달려있으므로 독자의 사랑을 바란다면 상당히 완곡하게 다루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진호전기에서는 강간을 한 놈에게보다 연지하에게, 그리고 그것을 눈뜨고 바라본 주인공에게 독자가 분노했습니다. 문제는 이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악당을 향한다면 악당을 죽이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주인공과 히로인은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는 사실을 그저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분노의 수위에 따라서 어떤 이는 어느 정도 참아내고 다음 권을 읽을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독자는 참지 못하고 책을 덮게 됩니다.
즉 진호전기의 경우엔 ‘강간’이라는 것을 ‘고난’이 아닌 ‘농락’의 차원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 강간 자체는 소설을 좋아하게 만드느냐 싫어하게 만드느냐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순수문학에서도 강간이라는 것은 터부시 되는 소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비슷한 상황을 설정해도, 어떤 경우엔 ‘고난’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엔 ‘농락’이 되는 것일까요? 그 차이를 이제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2. 고난, 그리고 농락
고난과 농락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독자에게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것이 고난이며 독자의 기대감을 배신하는 것이 농락입니다.
‘고난’에 해당되는 시련이 사용된 경우엔 독자는 시련 이후를 꿈꿉니다. 주인공의 성장이나 혹은 복수에 대한 기대감을 품습니다.
‘농락’에 해당되는 시련이 사용된 경우엔 작가는 기존에 독자가 품고 있던 꿈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즉 독자의 기대감에 역행하는 것이 ‘농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주인공이 그러한 위기를 벌어지지 않게 할거란 막연한 바람이 바로 독자가 품은 기대감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깨진 것입니다.
잠시 후에 시련이 ‘고난’이 아닌 ‘농락’이 되는 원인을 설명할 것이지만 먼저 예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a) 주인공이 약해서 뚜드려 맞는다면 그것은 ‘고난’입니다.
하지만 딱히 숨겨놓은 카드도 없으면서 능력을 과신하며 덤비다가 악당들이 주인공의 능력에 맞추어 짜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뚜드려 맞고 생사를 하늘에 맡기게 된다면 그것은 ‘농락’당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적에게 확실히 농락당했으며 독자는 주인공에 대해 품었던 기대감이 농락당했다고 느낍니다.
b) 어려서 뭘 모를 때 악당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고난’입니다.
긴 수련을 통해 강해진 주인공이 세상에 나와 어리버리 타다가 악당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농락’당한 것입니다. 독자가 주인공에게 품었던 막연한 기대감을 정면으로 배신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설정일 뿐이며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단지 독자는 주인공을 이용하는 악당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당하는 멍청한 주인공에게 분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c) 주인공이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부모님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고난’입니다. 아직 미완성인 그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아픔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능력이 크다는 것에 주목해 악당들이 그의 부모를 죽이고 그것을 다른 세력에 뒤집어 씌워 싸움을 붙인다면 그것은 ‘농락’ 당한 것입니다.
d) 주인공이 약하던 때에 여자친구가 강간당하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지켜봐야 했다면 그것은 ‘고난’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너무나 강하고 뛰어나기에 그의 여자친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강간을 한 이가 있다면 그것은 ‘농락’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독자에게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도 변호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을 인지한 독자들은, 그 강함이 주변인을 보호해 줄 것이란 기대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그 기대감은 위기가 점차 거대해 질수록 커지기 마련이며 만약 주인공이 이를 해결한다면 독자는 갈등이 해소되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만약 해결 짓지 못하고 결국 당하고야 만다면 독자는 주인공의 강함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 책임을 주인공에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주인공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며 예측 하거나 미리 방비하지 못한 것은 ‘주인공의 커다란 실수’이며 어쩌면 하룻강아지처럼 너무 나댄 것이 문제라며 그 책임을 주인공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감췄더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무 자신의 강함만 믿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주인공이 자초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3. 시련이 ‘농락’이 되는 두 원인
주인공이 약할 때는 독자는 주인공이 무엇에 당하든 관대한 편입니다. 웬만한 실수를 해서 집안을 말아먹지 않는 한 절대 주인공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다 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판단합니다. 감정도 충분히 몰입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적당히 넘어갑니다.
그래서 ‘농락’에 해당하는 시련이 나타나는 때는 어느 정도 주인공의 무위가 완성된 후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또한 어느정도 인물이나 상황에 대해 몰입되어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예를들어 주인공의 여자친구를 독자가 대단히 싫어하고 있다거나 별로 관심이 없다면 무슨 일을 당하든 큰 동요 없이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 하에 독자가 ‘기대감이 ‘농락’을 당했다’고 느끼는 시련은 두 가지 원인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인공이 편협하거나 생각이 짧거나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성정이 답답하여 멍청하게 당할 경우입니다.
멍청한 주인공을 독자들이 싫어하는 이유도 답답함과 분노가 주인공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중에 주인공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어느 수위가 넘을 시 소설 자체를 부정하고 깎아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소 멍청한 주인공을 사용하는 소설의 경우엔 그 멍청함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는 에피소드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감정 해소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혹은 미래의 큰 성장 가능성(예를 들면 머리가 좋아진다든지, 감춰진 능력이 있다든지)을 독자에게 은연중에 인식 시켜 아직 미완성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미완성된 주인공에겐 독자는 관대합니다. 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판단한 주인공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을 독자는 관대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참지 못한 독자들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며, 아무리 소설이 재미있어서 놓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무언가 찝찝함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독자가 느끼는 답답함과 불쾌감을 단숨에 묻어버릴 만한 좋은 전개가 없는 상황이라면 ‘농락’을 사용한 후 많은 독자가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게다가 그 찝찝한 감정은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영원히 남습니다. 그 소설을 떠올릴 때마다 재미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뭔가 거북함을 느낄 것입니다. 뭐 독자가 기억을 오래 해줄 것이라는 점에선 나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강한 주인공의 능력이 악당에게 드러나 있을 경우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주인공의 능력이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당한 것이냐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것이냐에 따라 ‘고난’이 되느냐 ‘농락’이 되느냐가 갈립니다.
주인공에 대해 잘 아는 상태에서 저질렀다면 악당들에게 빈틈을 보인 주인공의 멍청함에 분노합니다. 즉 ‘농락’입니다. 실제로 주인공이 대처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대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에 상관없습니다. 왜냐면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에 독자는 허망함과 배신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것도 지켜내지 못한 무력함에 화를 내며, 원인은 틈을 적에게 내준 주인공의 탓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반면 악당이 주인공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면 양상은 전혀 달라집니다. 독자는 감히 주인공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면서 덤빈 악당들의 멍청함에 분노합니다. 즉 ‘고난’이 됩니다.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강함의 수준에 대해서 크게 오판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고난’이 됩니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영화 테이큰(Taken)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전직 비밀요원이 자신의 딸을 멋모르고 납치한 인신매매 단체에 잔혹하게 복수하는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였습니다.
독자는 이를 지켜보며 한 단어를 머릿속에서 반복합니다. “감히! 감히! 감히!”
‘너희가 감히 누구를 건드린 줄 아느냐?’ 라는 겁니다. 그리고 복수를 통해 분노가 해소될수록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독자의 분노는 고스란히 적들을 향하며, 주인공의 화끈한 복수를 기대하게 됩니다.
4. 감춤의 미학
그래서 주인공의 무공 수위는 감추는 것이 유리한 것입니다. 주인공의 무공 수위가 감춰져 있는 상황이라면, 답답하고 멍청한 일을 벌이지 않는 한 항상 모든 시련은 ‘고난’에 속하게 됩니다. 사돈에 팔촌까지 죽어나가든 어떠한 무시무시한 일을 겪건 간에 독자는 주인공의 통렬한 복수를 기대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무공수위가 세상에 드러나 있을 경우에 점차 소설에 흥미가 반감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주인공의 능력을 적들이 알고 있다는 전제로 사건이 진행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들은 주인공 능력 이상의 계략을 짜내게 되고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농락당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최근 발행된 조돈형 작가분의 운룡쟁천이 그러한 경우인데 주인공의 강함이 적들에게 드러나 있고 그에 대한 견제로 그의 부모가 살해되기에 ‘농락’에 속하게 됩니다.
시련은 그것을 이겨내고 성장할 주인공을 꿈꾸게 만들지만, 농락은 거기에 당한 주인공의 멍청함을 조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취향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만약 주인공의 존재가 감춰져 있었거나 혹은 강하다는 것을 모르고 멋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면 감히 멍청한 짓을 벌인 악당에게 분노가 향했겠지만, 주인공이 너무 세상에 벌거숭이처럼 난 상황에서는 악당보다는 틈을 보인 주인공에게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주인공의 능력이 적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주인공이 ‘농락’을 당할 것이란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데도 주인공이 농락을 당하지 않는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지능지수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능력이 부주의하게 드러난 상태에서도 싸움에 앞서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면 작가의 개입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가지게 되며 자연스럽게 몰입감이 엄청나게 저하 됩니다.
또한 주인공이 강한 것이 확연히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무식하게 달려들거나 그에 준하는 대비를 하지 않는 적이라면 독자는 그 멍청함에 치를 떨게 되거나 혹은 부조리함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개연성이 떨어지는 소설을 만들지 않으려면 ‘농락’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간혹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것을 선택하는 소설도 있습니다. 아니면 소설 상에 숙적을 아예 안 만드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강한 주인공을 호쾌하게 잘 다루는 인기 작가들은 주인공의 실력을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데에 매우 익숙하며, 주인공에게 금제를 가한다거나 무언의 약속으로 제약을 걸어 그의 능력을 감추고 잠재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으로 주인공의 특이성을 유지시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갖은 수난을 당하는 주인공을 보면서도 그것을 농락이 아니라 시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듭니다. 악당들은 주인공의 진정한 힘을 모르기에 독자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앞날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향의 전동조 작가나 다크메이지의 김정률작가가 그러한 예입니다.
좀더 일반적으로는 작가 김강현의 마신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록 주인공의 능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적을 다 죽여서 목격자를 없앤다거나, 혹은 같은 편은 알게 해도 적들은 정확한 수위를 모르게 하는 수법을 쓰거나, 오만하거나 편협한 이를 만들어 주인공을 깎아내려 평가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든 주인공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5. 결론 - ‘농락’을 굳이 사용하겠다면 조심히.
이처럼 독자가 품은 기대감을 훼손시키느냐 아니면 충족시키느냐에 따라 독자의 취향은 호의적으로 또는 공격적으로 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취향과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농락’에 속하는 시련을 주인공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독자의 취향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무언가 큰 뜻이 있으며, 동시에 ‘농락’으로 인한 독자의 불쾌감을 상쇄시킬만한 즐거움이나 감동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후식 작가가 그의 작품 표류공주에서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 대신 그에 못지않은 감동을 준비하여 영원히 잊히지 않는 명작을 탄생시켰듯, 변독위약(變毒爲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과 답답한 선택이 가슴을 아프게 했으나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기억에 남았지요.
하지만 '농락'에 해당하는 시련은 독자의 답답함과 분노가 주인공을 향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인공은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축인 만큼 독자가 주인공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곧 소설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를 피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두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첫째, 주인공이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으로 불이익(시련)을 받는 에피소드를 사용하지 않고, 둘째, 주인공의 능력을 적에게 까발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만약 주인공에 대해 잘 아는 놈을 적으로 만든다면 그로인해 독자는 ‘농락’이란 위험한 전선줄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만 조심하면 독자가 주인공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련을 좋아하면 좋아했지 이를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소설을 생동감 있게 깨우는 감정의 활력소가 되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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