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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1 인위
작성
08.07.10 19:19
조회
4,067

(이 글은 장르소설에만 해당됩니다. 영화나 일반 소설과 다르게 장르소설은 읽기 전 독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기대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0. 시련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동료의 배신을 당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거나, 내공이 전폐당하거나, 기경팔맥이 막혀버린다거나, 어떠한 요인에 의해 정상인과 다른 저하된 능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좀 더 범위를 확장하면, 부모님이 살해당하거나 여자친구가 강간을 당하거나 동료가 암수에 당해 죽거나 주인공이 속한 문파가 멸문당하는 등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위기에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련들은 소설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시련과 마주하지 않는 주인공은 없으며 작가는 이와 같은 시련을 적절히 이용하여 이야기에 속도감을 붙이고 몰입하게 만들며 독자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련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련은 소설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시련은 독자가 소설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 논란이 된 진호전기가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불쾌감의 원인을 논하면서 ‘강간’이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어긋났다거나 개연성이 모자랐다거나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재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조절변수에 불과합니다.

강간은 구무협 뿐만 아니라 신무협에서도 많이 다루어졌으며 한 때는 소설마다 색마가 한 명씩은 꼭 등장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현실에서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강간을 당한 여자가 강간범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불쾌한 상황도 감정에 불을 더 지피는 매개변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나 아내 혹은 자식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것에 대한 복수극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들도 있습니다. 영화로 따지면 쏘우로 유명한 제임스 왕의 데쓰센텐스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똑같이 지인이 강간을 당하는 시련이, 어떤 소설에선 독자가 더욱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지만 왜 또 다른 소설에선 소설을 더 이상 읽기 싫어지게 만드는 것일까요?

1. 시련의 두 차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둘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가 있습니다.

시련에는 두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제부터 전자를 ‘고난’, 후자는 ‘농락’이라 표현하겠습니다. 이 둘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쉽습니다. 독자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을 보면 됩니다.

‘고난’의 경우엔 독자의 분노가 시련을 일으킨 원인을 향합니다. 즉 악(惡)을 향해 분노합니다.

그러나 ‘농락’의 경우엔 독자의 분노가 주인공을 향합니다. 즉 주인공에게 화를 냅니다. 혹은 시련을 당한 히로인에게 분노를 터트리기도 합니다.

즉 분노의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처럼 ‘농락’에 속한 시련을 지켜보는 독자는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거기에 당한 사람에게 분노하기를 선택합니다. 어떤 면에선 놀라울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경우는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둘은 독자가 소설을 읽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무시무시한 차이를 낳습니다. ‘고난’은 주인공에게 동조하게 만들지만, ‘농락’은 주인공이나 히로인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축인 만큼 독자가 주인공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곧 소설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즉 소설을 싫어하게 됩니다.

‘고난’이 옳고 ‘농락’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은 둘 다 옳습니다. 작가의 선택이며 설정이며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고난’과 ‘농락’이 독자에게 각기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지는 반드시 안 상태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위와 같은 차이를 간과하여 독자의 취향과 척을 지는 경우가 있는데 설정이야 작가의 마음이지만 독자가 책을 도중에 덮는 것은 독자에게 달려있으므로 독자의 사랑을 바란다면 상당히 완곡하게 다루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진호전기에서는 강간을 한 놈에게보다 연지하에게, 그리고 그것을 눈뜨고 바라본 주인공에게 독자가 분노했습니다. 문제는 이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악당을 향한다면 악당을 죽이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주인공과 히로인은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는 사실을 그저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분노의 수위에 따라서 어떤 이는 어느 정도 참아내고 다음 권을 읽을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독자는 참지 못하고 책을 덮게 됩니다.

즉 진호전기의 경우엔 ‘강간’이라는 것을 ‘고난’이 아닌 ‘농락’의 차원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 강간 자체는 소설을 좋아하게 만드느냐 싫어하게 만드느냐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순수문학에서도 강간이라는 것은 터부시 되는 소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비슷한 상황을 설정해도, 어떤 경우엔 ‘고난’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엔 ‘농락’이 되는 것일까요? 그 차이를 이제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2. 고난, 그리고 농락

고난과 농락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독자에게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것이 고난이며 독자의 기대감을 배신하는 것이 농락입니다.

‘고난’에 해당되는 시련이 사용된 경우엔 독자는 시련 이후를 꿈꿉니다. 주인공의 성장이나 혹은 복수에 대한 기대감을 품습니다.

‘농락’에 해당되는 시련이 사용된 경우엔 작가는 기존에 독자가 품고 있던 꿈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즉 독자의 기대감에 역행하는 것이 ‘농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주인공이 그러한 위기를 벌어지지 않게 할거란 막연한 바람이 바로 독자가 품은 기대감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깨진 것입니다.

잠시 후에 시련이 ‘고난’이 아닌 ‘농락’이 되는 원인을 설명할 것이지만 먼저 예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a) 주인공이 약해서 뚜드려 맞는다면 그것은 ‘고난’입니다.

하지만 딱히 숨겨놓은 카드도 없으면서 능력을 과신하며 덤비다가 악당들이 주인공의 능력에 맞추어 짜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뚜드려 맞고 생사를 하늘에 맡기게 된다면 그것은 ‘농락’당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적에게 확실히 농락당했으며 독자는 주인공에 대해 품었던 기대감이 농락당했다고 느낍니다.

b) 어려서 뭘 모를 때 악당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고난’입니다.

긴 수련을 통해 강해진 주인공이 세상에 나와 어리버리 타다가 악당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농락’당한 것입니다. 독자가 주인공에게 품었던 막연한 기대감을 정면으로 배신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설정일 뿐이며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단지 독자는 주인공을 이용하는 악당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당하는 멍청한 주인공에게 분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c) 주인공이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부모님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고난’입니다. 아직 미완성인 그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아픔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능력이 크다는 것에 주목해 악당들이 그의 부모를 죽이고 그것을 다른 세력에 뒤집어 씌워 싸움을 붙인다면 그것은 ‘농락’ 당한 것입니다.

d) 주인공이 약하던 때에 여자친구가 강간당하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지켜봐야 했다면 그것은 ‘고난’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너무나 강하고 뛰어나기에 그의 여자친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강간을 한 이가 있다면 그것은 ‘농락’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독자에게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도 변호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을 인지한 독자들은, 그 강함이 주변인을 보호해 줄 것이란 기대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그 기대감은 위기가 점차 거대해 질수록 커지기 마련이며 만약 주인공이 이를 해결한다면 독자는 갈등이 해소되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만약 해결 짓지 못하고 결국 당하고야 만다면 독자는 주인공의 강함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 책임을 주인공에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주인공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며 예측 하거나 미리 방비하지 못한 것은 ‘주인공의 커다란 실수’이며 어쩌면 하룻강아지처럼 너무 나댄 것이 문제라며 그 책임을 주인공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감췄더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무 자신의 강함만 믿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주인공이 자초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3. 시련이 ‘농락’이 되는 두 원인

주인공이 약할 때는 독자는 주인공이 무엇에 당하든 관대한 편입니다. 웬만한 실수를 해서 집안을 말아먹지 않는 한 절대 주인공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다 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판단합니다. 감정도 충분히 몰입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적당히 넘어갑니다.

그래서 ‘농락’에 해당하는 시련이 나타나는 때는 어느 정도 주인공의 무위가 완성된 후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또한 어느정도 인물이나 상황에 대해 몰입되어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예를들어 주인공의 여자친구를 독자가 대단히 싫어하고 있다거나 별로 관심이 없다면 무슨 일을 당하든 큰 동요 없이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 하에 독자가 ‘기대감이 ‘농락’을 당했다’고 느끼는 시련은 두 가지 원인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인공이 편협하거나 생각이 짧거나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성정이 답답하여 멍청하게 당할 경우입니다.

멍청한 주인공을 독자들이 싫어하는 이유도 답답함과 분노가 주인공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중에 주인공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어느 수위가 넘을 시 소설 자체를 부정하고 깎아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소 멍청한 주인공을 사용하는 소설의 경우엔 그 멍청함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는 에피소드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감정 해소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혹은 미래의 큰 성장 가능성(예를 들면 머리가 좋아진다든지, 감춰진 능력이 있다든지)을 독자에게 은연중에 인식 시켜 아직 미완성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미완성된 주인공에겐 독자는 관대합니다. 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판단한 주인공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을 독자는 관대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참지 못한 독자들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며, 아무리 소설이 재미있어서 놓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무언가 찝찝함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독자가 느끼는 답답함과 불쾌감을 단숨에 묻어버릴 만한 좋은 전개가 없는 상황이라면 ‘농락’을 사용한 후 많은 독자가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게다가 그 찝찝한 감정은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영원히 남습니다. 그 소설을 떠올릴 때마다 재미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뭔가 거북함을 느낄 것입니다. 뭐 독자가 기억을 오래 해줄 것이라는 점에선 나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강한 주인공의 능력이 악당에게 드러나 있을 경우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주인공의 능력이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당한 것이냐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것이냐에 따라 ‘고난’이 되느냐 ‘농락’이 되느냐가 갈립니다.

주인공에 대해 잘 아는 상태에서 저질렀다면 악당들에게 빈틈을 보인 주인공의 멍청함에 분노합니다. 즉 ‘농락’입니다. 실제로 주인공이 대처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대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에 상관없습니다. 왜냐면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에 독자는 허망함과 배신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것도 지켜내지 못한 무력함에 화를 내며, 원인은 틈을 적에게 내준 주인공의 탓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반면 악당이 주인공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면 양상은 전혀 달라집니다. 독자는 감히 주인공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면서 덤빈 악당들의 멍청함에 분노합니다. 즉 ‘고난’이 됩니다.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강함의 수준에 대해서 크게 오판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고난’이 됩니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영화 테이큰(Taken)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전직 비밀요원이 자신의 딸을 멋모르고 납치한 인신매매 단체에 잔혹하게 복수하는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였습니다.

독자는 이를 지켜보며 한 단어를 머릿속에서 반복합니다. “감히! 감히! 감히!”

‘너희가 감히 누구를 건드린 줄 아느냐?’ 라는 겁니다. 그리고 복수를 통해 분노가 해소될수록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독자의 분노는 고스란히 적들을 향하며, 주인공의 화끈한 복수를 기대하게 됩니다.

4. 감춤의 미학

그래서 주인공의 무공 수위는 감추는 것이 유리한 것입니다. 주인공의 무공 수위가 감춰져 있는 상황이라면, 답답하고 멍청한 일을 벌이지 않는 한 항상 모든 시련은 ‘고난’에 속하게 됩니다. 사돈에 팔촌까지 죽어나가든 어떠한 무시무시한 일을 겪건 간에 독자는 주인공의 통렬한 복수를 기대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무공수위가 세상에 드러나 있을 경우에 점차 소설에 흥미가 반감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주인공의 능력을 적들이 알고 있다는 전제로 사건이 진행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들은 주인공 능력 이상의 계략을 짜내게 되고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농락당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최근 발행된 조돈형 작가분의 운룡쟁천이 그러한 경우인데 주인공의 강함이 적들에게 드러나 있고 그에 대한 견제로 그의 부모가 살해되기에 ‘농락’에 속하게 됩니다.

시련은 그것을 이겨내고 성장할 주인공을 꿈꾸게 만들지만, 농락은 거기에 당한 주인공의 멍청함을 조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취향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만약 주인공의 존재가 감춰져 있었거나 혹은 강하다는 것을 모르고 멋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면 감히 멍청한 짓을 벌인 악당에게 분노가 향했겠지만, 주인공이 너무 세상에 벌거숭이처럼 난 상황에서는 악당보다는 틈을 보인 주인공에게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주인공의 능력이 적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주인공이 ‘농락’을 당할 것이란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데도 주인공이 농락을 당하지 않는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지능지수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능력이 부주의하게 드러난 상태에서도 싸움에 앞서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면 작가의 개입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가지게 되며 자연스럽게 몰입감이 엄청나게 저하 됩니다.

또한 주인공이 강한 것이 확연히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무식하게 달려들거나 그에 준하는 대비를 하지 않는 적이라면 독자는 그 멍청함에 치를 떨게 되거나 혹은 부조리함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개연성이 떨어지는 소설을 만들지 않으려면 ‘농락’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간혹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것을 선택하는 소설도 있습니다. 아니면 소설 상에 숙적을 아예 안 만드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강한 주인공을 호쾌하게 잘 다루는 인기 작가들은 주인공의 실력을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데에 매우 익숙하며, 주인공에게 금제를 가한다거나 무언의 약속으로 제약을 걸어 그의 능력을 감추고 잠재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으로 주인공의 특이성을 유지시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갖은 수난을 당하는 주인공을 보면서도 그것을 농락이 아니라 시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듭니다. 악당들은 주인공의 진정한 힘을 모르기에 독자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앞날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향의 전동조 작가나 다크메이지의 김정률작가가 그러한 예입니다.

좀더 일반적으로는 작가 김강현의 마신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록 주인공의 능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적을 다 죽여서 목격자를 없앤다거나, 혹은 같은 편은 알게 해도 적들은 정확한 수위를 모르게 하는 수법을 쓰거나, 오만하거나 편협한 이를 만들어 주인공을 깎아내려 평가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든 주인공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5. 결론 - ‘농락’을 굳이 사용하겠다면 조심히.

이처럼 독자가 품은 기대감을 훼손시키느냐 아니면 충족시키느냐에 따라 독자의 취향은 호의적으로 또는 공격적으로 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취향과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농락’에 속하는 시련을 주인공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독자의 취향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무언가 큰 뜻이 있으며, 동시에 ‘농락’으로 인한 독자의 불쾌감을 상쇄시킬만한 즐거움이나 감동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후식 작가가 그의 작품 표류공주에서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 대신 그에 못지않은 감동을 준비하여 영원히 잊히지 않는 명작을 탄생시켰듯, 변독위약(變毒爲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과 답답한 선택이 가슴을 아프게 했으나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기억에 남았지요.

하지만 '농락'에 해당하는 시련은 독자의 답답함과 분노가 주인공을 향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인공은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축인 만큼 독자가 주인공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곧 소설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를 피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두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첫째, 주인공이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으로 불이익(시련)을 받는 에피소드를 사용하지 않고, 둘째, 주인공의 능력을 적에게 까발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만약 주인공에 대해 잘 아는 놈을 적으로 만든다면 그로인해 독자는 ‘농락’이란 위험한 전선줄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만 조심하면 독자가 주인공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련을 좋아하면 좋아했지 이를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소설을 생동감 있게 깨우는 감정의 활력소가 되어줄 테니까요.


Comment ' 33

  • 작성자
    Lv.2 이사님
    작성일
    08.07.10 19:39
    No. 1

    감동인지는 모르겠으나 표류공주가 잊혀지지 않는 작품인건 사실이네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작가님이 꼬아두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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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6 살인코알라
    작성일
    08.07.10 19:55
    No. 2

    글잘읽었습니다. 고난과 농락에 대한 의견 무척 의미있게 다가오는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몇가지 궁금한점도 생기는군요. 고난과 농락이 모두 방법론적으로 옳다라고 하셧는데, 그점에 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드는군요.

    예시로 들은 신조협려(인위님의 말씀처럼 농락이라고 느낀 분들이 많다라는점에서는 동의하기 힘들군요)나 표류공주같은 작품들이 농락을 잘 사용한 예로 들으셨지만 그것은 농락을 잘사용해서가 아니라 독자가 농락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난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닐런지요? 왜나하면 독자가 예시작품을 읽을때 농락을 느낀다라는 전제가 깔려있기떄문입니다. 결국 독자가 애초에 예시작품에서 농락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있다면 인위님이 말씀하신 농락의 방법론적인 정당성은 뒷받침하기 힘들지 않을까합니다.

    개인적으로 분류하자면 캐릭터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있는가하면, 스토리성에 치중하는 작품들도 있고, 둘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작품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농락의 잣대는 일반적으로 캐릭터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에서 좀더 명확히 드러나는 기준이라고 생각듭니다. 스토리성에 치중한 작품에서는 그 의미가 희미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스토리성에 치중한작품의 경우 작가가 의도적으로 농락을 사용해도 독자가 느끼는 수위는 낮을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고난과 농락의 잣대는 타당성이 있지만, 농락의 방법론적 타당성을 제시하기위한 전제가 '독자가 예시작품을 읽으며 농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는 개인적인 느낌에서 출발하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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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0 인의검사
    작성일
    08.07.10 19:59
    No. 3

    훌륭한 분석이라고 생각됩니다. ^^
    농락 역시 사용되어서 안될 팩트는 아니지만, 사용에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부분은 항상 머리 속에 염두를 두고 있어야 할 듯 합니다.
    좋은 분석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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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0 20:03
    No. 4

    사실 개인적인 느낌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올렸습니다. 타당성을 제 개인의 시각 만으론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비판 정말 환영합니다.
    예시는 좀더 나은 걸로 사용할 걸 그랬습니다. 더위를 먹은 바람에 기력이 쇠잔했습니다. ㅠ.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살인코알라
    작성일
    08.07.10 20:11
    No. 5

    답변감사합니다. 제가 쓴글을 다시 읽어보니 좀 딱딱한느낌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인위님의 글에서 농락의 방법론적 정당성에는 약간의 의문점이 들지만, 고난과 농락의 잣대가 참 신선하게 다가왔고, 이번 진호전기 사태에서는 정확한 분석이라고 보여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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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슈퍼노바
    작성일
    08.07.10 20:22
    No. 6

    어렴풋하게 느끼던것을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래서 내가 답답해하고 책을 던졌구나... 새삼 읽다가 던져진 책들이 기억나네요(물론 책제목은 기억안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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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 론도
    작성일
    08.07.10 20:38
    No. 7

    그렇구나.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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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4 눈을감지마
    작성일
    08.07.10 20:41
    No. 8

    먼가 말하고 싶은데 무어라 말해야하는지 몰라 참았던 것들이 이글을 보니까 쏴악하고 씻긴듯이 내려가네요.
    시원합니다.
    진호전기 정말 5권에서 먼가 화가나는데
    본능은 화내지 말라하고 그 알수 엄썻던 찝찝함과 불쾌함
    그이유를 이제야 알것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8 드라카리
    작성일
    08.07.10 20:47
    No. 9

    님의 의견에 동감.... 대부분의 독자들은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보기 마련인데 혼자 바보같은 짓이나 하다 당하는 주인공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솔직히 전 표류공주도 별로였어요. 마지막에 책 집어던질뻔 했다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파라솔
    작성일
    08.07.10 21:21
    No. 10

    이건 표현에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문제라고 보여지네요.
    보면 주인공과 동일시한 독자들이 화내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서 윗 글에 저 2분적 구조로 나눈다면 독자층의 호불호가 가릴게 아니라 한쪽으로 편중되어야 하겠죠.
    사실 보면 화내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독자도 있고 색다르게 보는 독자도 있으니 독자의 개인차라고 생각합니다.
    몰입해서 동일시가 커지면 자신의 일과 똑같이 생각하는게 사람이니까요.그건 사람마다 틀리고 저렇게 구분짓는건 아니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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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0 21:35
    No. 11

    파라솔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작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공통적인 취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파라솔님이 말씀하신 몰입이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몰입을 하지 않았다면 기대감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도 농락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연지하가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글에 적어놓았듯이 '농락'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독자가 기대감을 품었을 때를 가정하고 그에 대한 배신감을 논하게 됩니다.
    기대감을 품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인물에 몰입하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그 영향은 많은 이들에게 공통될 수 있습니다.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몰입'을 또다른 전제조건으로 적어야 겠습니다.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물망아
    작성일
    08.07.10 21:48
    No. 12

    아주 신선한 관점이네요.
    제 경우엔 그다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앞으로 주인공이 시련을 겪게 되면 인위 님이 말씀하신 고난일지 농락일지 생각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싫어서 중도에 포기하고픈 글이 생긴다면 더더욱 주인공이 농락당하였는가 돌아보게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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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꿈일
    작성일
    08.07.10 21:59
    No. 13

    그저 기대에 어긋났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일반소설을 읽지 않고 장르소설을 읽는 이유가 거의 대리만족으로 굳혀져가는 중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라고 봅니다.

    보통 소설 중에는 주인공이 농락 당하며 몸부림치는 소설도 훌륭하면서 뛰어난 작품들 많죠. 흔히 말하는 배드 엔딩, 새드 엔딩이 그런 경우죠. 영화로 보면 대표적인 게 '세븐'이나 '미스트' 정도. 살인의 추억도 좀 그런 쪽이기도 하고요. 뛰어난 살인마나 형언할 수 없는 적에 놀아나는 주인공들이죠. 이런 것들을 볼 때는, 어떤 감상을 내실지 궁금합니다. 걸작이라고 하실지, 쓰레기라고 하실지. 제 생각엔 걸작이라고 하실 분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영화를 볼 때는 딱히 미리 갖고 있는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작품'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보게 되죠. 뭐, 마케팅으로 미리 이건 이러한 장르의 영화다, 해서 기대감을 갖고 볼 때도 있지만요.

    하지만 영화나 일반소설과는 조금 다르게, 장르소설은 읽기 전에 독자가 먼저 기대심리를 갖고 읽습니다. '대리만족'입니다. 물론 작품을 바라고 장르소설을 찾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정말 일부입니다. 대다수 장르소설 독자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대리만족'을 위해 읽습니다. 책방에 꽂혀 있는 책들과, 잘 나가는 책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종의 '작품'을 '감상'하려고 할 땐 장르소설을 굳이 안 찾습니다. 일반소설이나 영화 등을 찾죠. '대리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는 장르소설을 찾습니다. 자신이 농락당하는 걸 '느끼기는' 절대 싫은 거죠. '감상'할 수는 있어도요.
    장르소설에서 '농락'이라는 이야기 구성은 그래서 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스매치죠. '대리만족'을 위한 소설에서 자신이 농락당하면 당연 짜증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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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0 22:07
    No. 14

    네 꿈일님 말이 맞습니다. ^^
    제 글은 강하다 약하다를 기조로 이야기의 흐름이 구성되기 쉬운 무협소설과 환타지소설에만 해당됩니다. 독자의 기대감이 확고히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글을 적었는데 그걸 댓글로 다시 한 번 짚어주시니 아주 좋군요. ^^
    좋은 의견 잘 보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퇴근빌런
    작성일
    08.07.10 22:14
    No. 15

    잘 읽었습니다.
    진호전기에서 불거진 문제의 원인은 독자의 기대를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으며, 제시되지 않은 것은 저자가 독자의 바람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5권에서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 진호전기 문제는 저자가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였으며, 강조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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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0 22:28
    No. 16

    까망군님은 저보다 한 걸음 더 걸으셨군요.
    "진호전기 5권의 내용을 일부 독자가 싫어하게 된 이유는 강간 때문이 아니라 독자가 품은 기대감이 농락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은 이상 독자의 취향은 소설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까지가 제 의견입니다.
    전 감상가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까망군님의 평론가로서의 기질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이상의 해석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0 22:36
    No. 17

    이 글은 진호전기때문에 쓴 글이 아니라 이제껏 제가 읽은 소설들 중 일부가 제 "취향"에 왜 어긋났는지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쓴 글입니다.
    맥락적으로는 진호전기에 대해 이야기한듯 하지만 실은 운룡쟁천을 재미있게 읽다가 2권 말미에서 생긴 생각 때문에 적게 되었습니다.
    비평이라기 보다는 취향에 의거한 감상에 불과하지만 좋은 의견을 많이 제시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1 사련
    작성일
    08.07.10 22:44
    No. 18

    마음에 확 와닿는 글이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o*****
    작성일
    08.07.10 23:32
    No. 19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퇴근빌런
    작성일
    08.07.11 09:21
    No. 20

    결국 옮겨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Dainz
    작성일
    08.07.11 11:23
    No. 21

    대체적으로 읽기 힘든소설, 외면받는소설등의 약점을 잘 짚어낸거같습니다.
    읽으면서도 짜증나는 소설들의 특징이죠.
    답답한 주인공의 행보, 개연성없는 사건들의 나열, 감정소통이 안되는 인물들, 게다가 통쾌함도없고...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꿈돼지
    작성일
    08.07.12 14:53
    No. 22

    좋은 글이네요 ^^ 정말 잘봤습니다. 농락이란 매우 위험한 칼이죠. 대부분의 경우에 정말 소설을 독자가 막장으로 보게하는 큰 원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험한 칼을 쓸려면 좀더 좋은 필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nacukami
    작성일
    08.07.12 21:19
    No. 23

    공감합니다. 100% 같지는 않겠지만 제 생각도 인위님의 생각과 유사한 듯 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금원
    작성일
    08.07.13 18:33
    No. 24

    글쎄... 제가 진호전기를 싫어하는이유는 정파가 자정작용이 전혀없다는 점과 사부가 제자의 강간을 유도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때문이지요. 요새 트렌드가 마인은 협객 정파는 뒤치기라지만, 진호전기는 이걸 너무 악화시켰달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3 18:43
    No. 25

    그건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련'과 주제적으로 다른 요소입니다. 소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요. 저는 그들 중 하나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주인공을 싫어하게 만들어 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이끌어내는 요소는 미리 차단하기 쉬운 만큼 조심하자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무영무종
    작성일
    08.07.17 02:59
    No. 26

    좋은 의견 잘 읽었습니다. 일면 인위님의 글에 공감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제 생각과는 다른 점이 있기에 몇자 적고 갑니다.
    주인공 = 절대무적 이란 공식이 성립하는 소설이 몇 있었습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서 권왕무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머리, 무공, 정신력 모두 절대자에 가까운 주인공을 등장시켰죠. 이런 주인공의 경우에는 님께서 주장하시는 농락과 고난의 이분법이 통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떨까요?
    무협소설의 영원한 고전 중의 하나인 김용의 의천도룡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주인공 장무기는 무공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 수준입니다. 머리도 좋습니다. 오성이 뛰어나 무공 구결의 암기 뿐 아니라 이해력과 응용력 또한 탁월 합니다.하지만 성격이 어질고 순후하며 좀 우유부단하지요...다시 말하면 강점 뿐 아니라 약점도 있다는 점이지요.
    이런 장무기가 간계에 당하는 일이 몇차례 나옵니다. 그러나 어느 독자도 장무기의 멍청함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또한 장무기가 이를 극복하고 결국에는 적을 물리치기를 바라지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잘 알려진 군림천하에서 보면 유운검법을 극성까지 연마한 주인공 진산월 또한 절대고수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성격은 침착하고 머리도 매우 좋고 심기도 깊습니다. 하지만 취미사 혈겁의 함정에 빠져 하마터면 무림의 공적으로 몰릴 뻔 하였습니다만, 독자 누구도 그를 탓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존휘의 간계를 깨뜨리고 매장원을 쓰러뜨릴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요.
    분명 인위님의 기준으로 볼 때면 고난이 아니라 농락을 당할 뻔한 위기인데 말이지요.
    역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결국은 글 솜씨의 차이라고 봅니다...^^ 독자를 어떻게 몰입을 시키고, 위기를 얼마나 절절하게 느끼게 하는지...
    주인공이 강하냐 안 강하냐의 문제보다는 주인공이 손을 쓸 수 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얼마나 독자를 몰입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글솜씨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쓰신 강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여주인공이 강간을 당했다고 할 때 일면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많겠지만 이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 하는 것은 결국 작가의 몫입니다.
    언급하신 진호전기는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만약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여주인공에 대한 호감이 깨진 안타까움과 독자가 보기에 주인공이 조금만 신경썼더라면 방비를 할 수 있었던 상황임에도 억지로 풀어간 엉성한 전개에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요?
    마치 드라마에서 우연의 연속에 의해 만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두 연인을 볼 때 느끼는 짜증과 같은???
    여주인공이 순결을 잃는다는 점에서 신조협려 또한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이후 두 주인공간의 이별과 애처로움에 동조하게 만든 김용 작가의 글솜씨는 이 소설을 자신의 소설 중 연성결, 벽혈검과 더불어 사랑에 한한 한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긴 의견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7 05:43
    No. 27

    무영무종님 의견도 옳습니다. 글솜씨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단 예로 드신 진산월과 장무기의 경우 모두는 '농락'의 전제조건이 미충족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나타나기 때문에, 즉 주인공이 무공에 있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된다는 점에서 독자는 모든 어려움을 시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군림천하의 경우엔 취미사 혈겁이나 등등 여러 일이 일어나지만 진산월이 약하기에 수모를 겪게 되는 경우였고 이러한 위기를 똑똑한 머리로 헤쳐나갔습니다. 멍청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에 농락요인 1번 주인공이 답답하거나 멍청하게 행동하여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으며, 둘째는 애초부터 적이 주인공 진산월보다 강한 상태였고(즉 진산월은 적과 싸울 만큼 완성되지 못한 인물이며) 무엇보다 항상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적이 진산월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산월이 강해진 지금 복수극이 진행 중입니다. 강해진 이 후 바보같은 행동으로 당하는 장면은 아직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의천도룡기의 장무기 같은 경우엔 상당히 여자문제에 있어서 유유부단한 편이라 이 부분에서 독자의 호불호가 갈린 인물로 기억합니다.
    이 녀석도 무언가에 당할 때는 약할 때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성장기의 인물로 보지, 그 강함이 완성된 인물이라고 보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위기는 항상 기회였고 그래서 그 기회를 붙잡아 성장하는 것이 김용식 위기관리법인지라 김용의 경우에는 농락은 항상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시련밖에는 없습니다. 즉 독자의 기대감을 배신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김용의 소설들에선 항상 주인공의 무위가 감춰져 있습니다. 적들이 주인공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강호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 주인공이 나타나 이를 해결하는 식입니다. 바로 그 순간까지 주인공은 항상 강한 적들을 맞아 기지로 헤쳐 나가고 그 와중에 기연을 얻어가며 빠르게 강해집니다. 적은 보통 강한 주인공에게 뒤통수를 맞는 식입니다.

    확실히 무영무종님 말대로 작가의 글솜씨가 좋으면 항상 농락이 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농락의 전제조건을 피해가는 것이지요.
    농락요인1. 주인공이 멍청하게 당하는 경우
    극복a) 미완성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부각시킴 - 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바라보도록 함.
    극복b) 멍청하게 당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어 강해짐 - 역시 성장을 강조

    농락요인2. 주인공의 능력이 적에게 완벽히 파악되어 함정에 빠지는 경우
    극복a) 주인공이 약할 때 사용하여 미완성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부각
    극복b) 애초에 주인공의 능력이 적에게 파악되는 일이 없습니다. 주인공의 능력이 적에게 알려져 있다면 다시 만날 때는 더 강한 상태로 만나게 되고 그리하여 적의 함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스토리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무영무종님의 말씀도 대단히 옳습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글솜씨가 어떠냐, 혹은 어떠한 장치를 준비했느냐에 따라 '농락'적 요소를 시련으로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작가는 어떤 글을 쓰든지 독자의 기대감이 배신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사전에 잘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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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7 05:58
    No. 28

    농락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간단합니다. 독자가 화를 내는 방향입니다.
    "주인공에게 화가 난다." 이것은 농락이 사용된 것입니다.
    "적에게 화가 난다." 이것은 시련이 사용된 것입니다.

    주인공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농락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 장치가 있는 것입니다. 분석해보면 어떤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에 농락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글솜씨가 좋은 작가는 "독자는 주인공에게 화가 난다."라는 것이 충족되지 않기 마련이고 그것은 애초에 농락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용무종님의 말씀과 같이 글솜씨에 따라서 변한다면 다음의 예가 필요합니다.
    "독자는 주인공에게 화가 났다. 그의 행동에 열받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소설이 더 재미있어졌다."
    만약 독자가 이렇게 느끼게 만드는 소설가가 있다면 그 글솜씨는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인위
    작성일
    08.07.17 13:45
    No. 29

    아참 신조협려에서 농락의 가능성이 높은 장면은 두 부분입니다. 원래 그 두가지는 본문에서 농락의 한 예로 다루고 있었는데 글이 길어져서 뺐습니다.
    첫째. 윤지평이 소용녀를 몰래 강간하는 부분
    둘째. 곽부에 의해 양과의 한쪽 팔이 잘리는 부분

    이 두 장면은 독자에게 큰 분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향했습니다.

    첫째 부분은 구양봉이 혈도를 점해서 발생하는 일이기에 구양봉에게 미움이 가지만 구양봉은 주인공에게 호의를 가진 인물이며 소설 상에서 그를 반가워하는 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분노가 공중에 떠버렸습니다.
    하지만 답답하게 오해를 해버리고 떠난다는 사실은 소용녀나 양과의 관계에 답답함을 느끼게 했고 첫번째 농락 요인이 조금은 발동합니다.

    둘째 부분은 곽부에게 엄청난 분노가 갔습니다.
    그 장면에선 곽부가 양과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며 그를 깎아내리다가 무심코 팔을 잘랐습니다.
    즉 여기서 적이 양과의 무공 수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두번째 농락요인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곽부가 휘두르는 칼에 멍청히 당했다는 점에선 첫번째 농락요인이 충족되며 이로인해 독자는 곽부에게 화를 내면서도 마찬가지로 양과에게도 화가 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대감을 잃은 대신 다른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기대감의 교체가 일어난 겁니다.
    본문에서 말했다시피 농락을 써도 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농락을 극복할 만한 무언가가 독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첫번째 케이스의 경우엔, 그 사건으로 인해서 양과가 무한한 자유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게 됩니다. 나름 강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독자는 양과의 강호주유에 금새 집중하게 됩니다.

    두번째 케이스의 경우엔, 그 사건으로 인해서 양과는 독고구검을 연성하기 시작합니다. 독자는 그에 기대를 하게 되고 역시나 예전보다 더욱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확실히 무영무종님 말이 진리에 근접해 있습니다.
    농락을 사용하더라도 작가의 글솜씨가 좋으면 독자에게 순식간에 다른 기대감을 안깁니다. 이전에 품은 기대감이 깨진 대신 다른 기대감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야기는 더욱 맛깔나 지는 것이지요.

    만약 글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는 작가라면 농락은 사용했으되 다른 기대감으로 교체해 주는 것을 소홀히 할 테고, 독자는 뻑난 씨디처럼 같은 분노에서만 뱅뱅 멈춰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무영무종님 말씀대로 그리고 제가 본문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대로 농락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잘 이용해야 할 부분이지요.

    "작가가 글솜씨가 좋다면 농락을 사용할 경우 농락으로 파괴된 기대감을 대체할 만한 다른 기대요소를 재빨리 독자에게 부여하여 독자의 시선을 농락으로부터 돌립니다. 이를 통해 소설에 계속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확실히 뛰어난 글솜씨의 작가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마니저아
    작성일
    08.09.17 14:01
    No. 30

    작가에게 화가나는건 어떤경우인가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마니저아
    작성일
    08.10.01 13:38
    No. 31

    전 김용 소설중에 신조협려만 읽다가 중간에 그만뒀는데 인위님 글대로 농락 당한거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3 댄간
    작성일
    08.10.05 15:10
    No. 3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들이 한 번씩 참고했으면 좋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 빠나나우유
    작성일
    10.01.03 09:05
    No. 33

    저도 인위님과 비슷한 취향인가보네요. 대체로 공감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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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 무협 광해경 - 이훈영 월드 3부작 마지막 작품 +10 Lv.9 88골드 12.01.13 9,484 20 / 2
1196 무협 운룡쟁천을 읽고...(미리니름들도 포함) +3 Lv.50 독행로 12.01.08 2,770 4 / 5
1195 무협 독종무쌍- 독종 다 죽었네.... +8 Lv.68 영원한꿈 12.01.04 8,494 6 / 0
1194 무협 황금공자 5권 +30 Lv.31 스카이림 12.01.01 7,220 17 / 12
1193 무협 도지산...읽다가 출판사가 혹시 거긴가? 하며 표지... +18 Lv.26 비와우뢰 11.12.21 5,135 19 / 2
1192 무협 염왕화조 기대했던 작가님의 아쉬운 작품 +10 날개... 11.12.15 5,725 10 / 1
1191 무협 용중신권 +22 Lv.99 whitesku.. 11.12.11 4,920 14 / 11
1190 무협 패군 완결까지 달렸습니다. +8 Lv.99 필살유혼 11.12.01 3,882 3 / 6
1189 무협 드라마틱한 절대강호 +16 Lv.38 로지텍맨 11.11.30 3,048 10 / 22
1188 무협 구룡제... 성장과정이 아쉽습니다. +4 날개... 11.11.29 2,820 7 / 2
1187 무협 비뢰도-정말 왜 이러는거냐? 장난해? +62 Lv.1 신마녀 11.11.28 14,236 41 / 4
1186 무협 풍운객잔 9권을 넘기며 +3 Lv.24 바람피리 11.11.26 5,650 10 / 1
1185 무협 화공도담 진자명을 위한 약간의 변명 +46 Lv.1 초라한논객 11.11.16 4,112 11 / 71
1184 무협 독보지존에 지존은 없고 조연만 있다 +5 Lv.53 초절정고수 11.11.15 4,777 5 / 7
1183 무협 대괴선 완결.이 책은... +10 Lv.9 슈자 11.11.12 5,267 9 / 4
1182 무협 장영훈작가님.히로인들은 왜 다 쳐내시옵니까 +19 Lv.1 블루마이 11.11.07 5,459 6 / 9
1181 무협 천애협로 2권 +3 Lv.51 나라장터 11.11.07 2,485 5 / 1
1180 무협 천애협로 2권을 읽는 중에... +9 Lv.99 신의망치 11.11.06 2,490 2 / 3
1179 무협 절대강호 8권을 읽고. (네타있음) +11 Lv.81 암혼 11.11.05 3,552 5 / 17
1178 무협 천년검로의 노력에 대해서.. +73 Lv.1 [탈퇴계정] 11.11.04 3,855 31 / 23
1177 무협 천년검로. 노력이라면서 왜 치트를 쓰냐.. +76 Lv.33 흑봉황 11.11.02 5,093 53 / 43
1176 무협 쟁자수를 읽어봤습니다. +14 Lv.99 필살유혼 11.10.30 4,951 13 / 4
1175 무협 고금제일인 +3 Lv.19 헤비메탈 11.10.17 3,567 1 / 1
1174 무협 [미리니름]가람검작가의 더스토리를 읽어봤습니다. +21 Lv.97 念願客 11.10.16 5,071 21 / 7
1173 무협 불패검선 처음으로 비평란을 방문하게 만드는... +17 Lv.3 반갑자내공 11.10.14 5,189 14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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