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항몽
작품명 : 진가소사
출판사 : 동아발해
- 간단한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편의상 평어체를 사용합니다.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있다. 먼 길을 떠나 왔는지 먼지가 쌓이고 땀에 절어 행색이 초라하다. 그런데 그 둘은 처음 만난 사이처럼 어색한 느낌이다.
진가소사는 10년만에 처음 만난 부자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진가평, 아들의 이름은 길에서 만난 자운진인이라는 분에게 얻은 진소명이다.
진가평은 왜 아들 소명이를 10년 만에야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진가평은 10년이 넘게 떠돌며 무엇을 했고 왜 떠돌아 다녀야만 했을까?
이제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정착하려는 모양이다. 진가평은 그동안 무심했었던 사부님과 은혜를 입었던 어른들을 두루 찾아뵙고 아들과 함께 인사를 드린다. 집으로 돌아와 세간을 정리하고 고향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는 가슴 속 한을 잠시 젖혀둔 채 가장이 되고, 아들은 무공을 익힌 아버지를 동경하며 자신도 무인이 되기를 꿈꾸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고향에 돌아오면서 추억이 어린 사람들을 만나니 저절로 회상에 잠긴다. 잘만 풀렸으면 평탄했을 인생, 행복했던 시절.. 진가평은 그 시절이 꿈만 같고 아직도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가장으로서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기초를 배우며 무공을 다지던 아들 진소명은 자신에게 이름을 주었던 자운진인을 따라가서 보다 높은 무공과 배움을 얻고자 한다. 자운진인은 강요하지 않으며 틀 속에 가두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라는 스승이다.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지켜보아 주고 제자가 헛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돌봐주는 물과 같은 덕을 지닌 사람이다.
어느 날 제자가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없는 시련에 처하게 되자, 스승은 제자가 사람의 숲에서 몸으로 겪으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함께 길을 떠난다.
물론 보다 세세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1,2권 대충의 줄거리는 저 정도이다. 줄거리를 알고 있더라도 글의 재미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눈에 띄는 사건은 밝히지 않겠다.
이 소설은 어떤 명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쓰여진 것 같지 않고 작가의 작위적 설정을 위해 글이 따라가지도 않는다. 권선징악적 교훈이라던지 복수의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등의 의도를 느끼기 힘들다.
진가 집안의 작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다른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며 이야기의 시점이 변화되지 않는다. 진가평 혹은 진소명의 눈에 비쳤던 추억을 회상한다던지 지금 바라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진가의 작은 역사 라는 제목에 충실한 글이다.
다른 무협 소설은 주인공 외에 특이한 조연들, 반대되는 세력과 음모같은 것들로 극적인 재미를 주려 애쓰는 반면, '진가소사'는 처음부터 진가평, 진소명 두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다.
마치 진씨 두 부자 모두에게 최대한 편안한 모습을 부탁한 후 그런 그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 같다. KBS에서 방영하고 있는 리얼다큐프로그램 '인간극장'처럼 말이다.
시야를 확대시키지 않고 진가평과 진소명 부자의 시야로 한정되는 일상을 그대로 옮겨와 풀어내는 듯한 모습이 다른 무협과 차별된 색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그렇게 느낀 이유는 소설 속에 쓰여진 단어 하나, 속담 하나, 인용 하나가 허투루 쓰인 것이 없기 때문일 터이다. 정말 공들여서 쓰여진 소재들 때문에, 이것은 소설이고 글이지만 글 속의 상황과 현실이 머릿 속에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글을 읽는 것이지만 촬영된 방송을 바라보는 느낌이라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이 글은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너무 어려워서 독자가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빔밥처럼 한 숟갈 크게 떠 넣고 우적우적 씹어먹는 느낌이 아니다. 커다란 상에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을 정성스레 조심조심 음미하면서 먹는 느낌이다. 한식도 그냥 한식이 아닌 궁중음식처럼 고급스럽고 세련된 정통한식이다.
글 속의 분위기나 사용되어진 단어들이 그런 정갈하고 차분하면서 경건한 느낌을 주었다.
무협 소설이기 때문에 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다만 다른 무협 소설과 차별되게 비급을 통해 절세 고수가 된다던지 기연을 얻어 환골탈태하면서 단숨에 성장하지 않는다.
武의 경지를 사부의 가르침과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개척하는 노력이 인상적이다. 스승은 제자의 곁에서 기본을 강조한다.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항상 강조한다. 옆을 바라보면 정말 기본에 대해 하나 하나 가르치는 스승이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이다. 제자가 올바른 길에 도달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스승의 마음이 확연히 느껴진다. 진가평의 스승과 진소명의 스승은 그 가르침이 무공의 특성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스승의 제자를 아끼는 마음과 언제나 기본을 강조함은 차이가 없다. 무술이 아닌 무도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리얼 다큐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시대의 삶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 들게하기 때문이다. 읽기만 해도 글 속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듯하다. 중국의 속담을 그대로 인용하는 등 익숙한 듯 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낯설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관광객이 된 것 같다.
글 속의 사람들이 하는 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 그려지는 모습 그대로라고 믿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새로운 세계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하면서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작가가 그리는 세계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 약간의 오차가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차이를 구분할 만큼 해박한 지식이 없어서인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의 무협의 세계가 가지는 비현실성 때문에 '그런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반드시 역사속의 현실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중국의 역사이고 그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봤자 읽는 이가 오히려 낯설음을 느끼니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역력한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니 생각보다 훨씬 사실감이 넘침에 감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역사드라마를 보면 소품 하나하나를 따지며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드라마에 나오는 작은 소품과 장식, 머리모양과 같은 세세한 부분들의 사실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런 세심한 손길이 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도 그런 손길이 느껴지니 글쓰는 사람의 프로정신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무림인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도 잘 조명해 주고 조화롭게 구성하는 것 또한 무협 리얼 다큐라 부를만 하다. 객잔에 들리면 무림의 후기지수와 시비가 붙어 악연이 쌓인다던지 무림의 어여쁜 여고수들과 인연을 쌓아가는 등 천지에 무림인들 투성이인 무림세계가 아니다. 우연을 가장한 작위적인 설정들로 글을 이끌어 나가지도 않는다. 진가소사는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비추어 주고 그 틈 속에서 살아가는 무림인의 모습을 잘 버무려 보여준다.
글의 분위기를 경건하고 차분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데 한편으로 우려가 되는 점이 있다. 단어들이 낯설고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글의 앞 뒤 문맥에 따라 뜻을 파악할 수는 있으나 솔직히 모르는 단어들도 간간히 보인다. 그래서 10대에게는 어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책 아래에 각주를 달기도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각주설명의 글자를 조금 작게 하는 대신 보다 많은 수의 첨언을 통해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배려를 바라게 된다.
어려웠던 단어들을 기억나는대로 나열한다면 '는실난실, 가다루다, 이녁, 지싯거리다, 너누룩하다, 곱송그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낯선 단어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판사의 몫이라 생각하는데 조금 더 신경을 써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들은 일단 좋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런 것들 중에는 나와 코드가 맞지 않아 안타까웠던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추천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중들의 인정을 받고 호평을 받는다는 사실은 분명 그것이 호평을 받을 만한 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진가소사 또한 사람들의 호평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읽었던 작품이다. 읽어보니 확실히 호평받을만 하다.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는 대량생산품이 아니라 구석구석 하나하나 손가지 않은 것이 없는 수제품의 느낌이 난다.
정성이 담긴 글이라는 것은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무협 소설을 읽는 눈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다. 자신의 취향이 아무리 읽기 편한 글 쪽이라고 하더라도 한번 읽어봐 주기를 바란다.
흰 티에 청바지가 편하고 익숙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세련된 정장처럼 조금 불편하지만 갖춰입는 복식도 나름대로 멋이 있고 즐거움이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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