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엘리슨 위어
작품명 : 엘리자베스 1세
출판사 : 루비박스
시오노 나나미가 추구한 것은 재미있는 역사이다. 즉 역사로서 교운성이나 정치성보다는 역사 그자체를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시오노 나나미고 그결과 탄생한 것이 로마인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왜 시오노 나나미의 이야기를 하며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이와 비슷한 취지가 있다. 즉 이것은 팩트나 픽션의 사이에 위치한 팩션이다.
작가 엘리슨 위어는 이러한 팩션의 대가이며 또한 영국인들은 이런 팩션을 좋아한다. 왜 냐하면 역사는 충분히 그들에게 있어서 교양으로서 즐기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 여왕의 정치적 행적이나 위업을 중심으로 에기하기 보다는 여자로서의 삶을 예하는것에 중점을 둔다. 더군다나 이책은 엘리자베스의 삶을 최대한 따라가려 하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조금 지겨운 면도 많다. 즉 기승전결이 축약 되지 않고 사실 그대의 전개를 보여주려 한다는 면에서 픽션으로서의 재미가 반감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면에서 대단히 여왕의 심리를 잘파악할수도 있다. 그것이 이책의 장점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최고의 전제군주중 하나이다. 튜더왕조는 절대군주적 왕조로서 강력한 권한을 누렸다. 그뒷면에는 수많은 군주의 독단적인 폭력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들의 군주를 사랑하였다. 그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군주가 항상 그들과 소통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엘리자베스1세는 전제권력을 휘둘렀지만 최대한 신하들의 진언을 들었으며 또한 자신이 독단으로 처리한다는 이미지보다 심사숙고끝에 의견을 듣고 처리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또한 왕실의 르네상스 군주 치고는 항상 검소하였으며 지배자 그리고 위정자로서의 왕이라는 이미지 보다 국가의 상징으로서의 왕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의회는 군주가 자신들의 의견을 듣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였고 시민들은 군주가 자신들에게 잠시 답례하는 것에 환호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이것이 스튜어트 시대에 무너진것은 어떻게 보면 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당시 영국 하원의원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제임스 1세는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해하였지만 찰스 1세는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과 연관해서 생각해봐도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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