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한강'을 읽어본 이후로 대하소설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내게 설봉의 12권짜리 장편무협 '사신'은 새로운 기대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이미 고무협 게시판 등을 통해 그 위명을 쟁쟁하게 들어왔던 터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설봉의 '사신'...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의 짜임새와 방대한 자료, 그리고 긴장감 넘치는 사건 전개 등 '역시 설봉' 이라는 감탄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대작임이 분명한 듯 하다.
특히 치밀한 자료수집을 통해 마치 백과사전을 보는 듯 눈 앞에 펼쳐지는 무공이론이라든지 상·중·하단전에 따라 다르게 발휘되는 무공, 십방, 살수들의 혈배 등 그만의 독특한 무협관을 새롭게 창조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적지않은 감탄과 찬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부지런한 작가는 언제나 독자에게 기대와 뿌듯함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설봉이라는 작가를 발견한 것은 분명 내게 큰 기쁨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큰 기대를 갖고 본 작품이기 때문에 작품 곳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을 발견할 때면 적지않은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사신'을 대작이라고 말하면서도 굳이 '2% 부족하다'고 토를 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무공수위의 부조화 & 절대고수의 인플레이션
- 작품 초반 적지인살과 종리추가 십방으로 쫓기는 과정에서 드러난 개방의 무위는 다른 무협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감동을 불러왔다. 3~4결 제자만 해도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숨막히는 추격전을 펼치니... 구파일방이 왜 '구파일방'인지를 피부에 와닿게 만드는 현실감 넘치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작품 중·후반부에 들어서면서는 주인공급들도 감히 어찌해보지 못할 초고수들이 구름과 같이 등장, 현실감이 서서히 떨어지더니 결정적으로 '천객'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마치 먼치킨 소설을 읽는 듯 작품에 대한 몰입감이 공중으로 분산돼 버렸다.
종리추와 맞서 싸우며 부상을 입힌 소림 5선사의 무위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이들이 소림 72단승중 5명일 뿐이라는 설정에서 그랬고, 살무령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묘사되던 절세기재 소고가 작품 중후반부로 가서는 이리저리 깨지고 보호받아야 할 정도의 나약한 무공수위로 전락해버린 것도 이 작품이 초반에 탄탄하게 쌓아올렸던 무공수위의 현실감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특히 천객의 설정은 이 작품의 완성도를 30% 정도 후퇴시킨 주범으로 손꼽고 싶다. 온갖 독물에 의해 심신을 단련하는 구진법을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불과 1~2년 사이에 7~8명의 청년들이 무림제일고수가 됐다는 설정도 황당하지만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악을 미워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문을 배신하고 사문의 존장을 해칠 정도로 막나간다는 것도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이는 주인공에 필적할만한 고수를 등장시키기 위해 시도한 작가의 무리수로 보여지며, 결과적으로 작품 전체의 개연성에 치명적인 오류로 이어졌다.
2. 늘어지는 스토리 & 지나친 상황·내면 묘사.
- 장장 12권짜리 장편소설에서 스토리가 단편소설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것부터가 욕심이겠지만, '비뢰도'의 악몽만큼은 떠올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종리추가 소고를 위해 살문을 희생한 뒤 가족들이 있는 천부로 탈출하는 과정까지는 전혀 나무랄데 없는 완성도를 선보였지만 그 이후의 사건진행은 무척 더디고 무미건조하다.
천부 이후 작품은 살문의 재등장과 또다시 내려진 십망, 그리고 팔부령에서의 접전, 비객·천객의 등장, 소고의 합류, 개방과 하오문의 협력, 모자도에서의 위기, 천외천의 붕괴 등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나열식으로 반복되고 이같은 전개가 소설책 5~6권 분량에 이르는 것은 독자에게 상당한 지루함을 안겨줄 수 밖에 없다.
사신이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주변정세와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지나치게 많은 면이 할애됐다는 점이다.
이것이 작가 설봉의 본래 글쓰는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을 이 요소가 사신 후반부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작가의 참견으로 느껴진다.
본인의 경우, 작품 후반부로 가서는 대화 이외의 장면묘사는 대충대충 건너뛰게 될 정도로 읽기에 지쳐 있었다.
3. 지나치게 많은 오타 & 오류
-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순 없겠지만 사신에서는 유독 오타와 오류가 많이 눈에 띄었다. 이는 작가와 출판사의 성실성 문제와도 상통한다.
맞춤법에 안맞는 부분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고, 팔부령에서 천외천 고수에게 죽은 살문 살수가 유구에서 유희로 뒤바뀐다거나 구진법을 통과한 천객 수가 7명과 8명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부분에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무리 정성들여 지어 올린 밥이더라도 밥 먹다 돌씹으면 결코 칭찬받을 수 없다.
4. 벌여놓은 사건에 비해 너무 단조로운 종결
- 이 소설을 읽으며 그 비중을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야이간'과 '여숙상'이다.
소설 중간 중간 이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길래 뭔가 결말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못된 짓만 일삼던 야이간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맨 마지막에 다리병신 주루 주인으로 잠깐 등장하고, 모자도에서 한을 품고 도망간 여숙상은 그 뒤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역할을 할 캐릭터였다면 굳이 작품 중간중간에 작가가 이들의 행적을 공들여 조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작품 중·후반부에 걸쳐 이야기 구조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천객과 천외천의 결말도 허무하기 그지없다.
모자도에서 종리추의 궤변 몇마디(우리가 살수라는 증거 대봐! 없지? 까불지마)에 우왕좌왕하다 결국 스스로 붕괴되고 그 우두머리인 백천의는 작품 말미에 잠깐 등장해 주인공과 싸우다 죽는다는 단조로운 스토리 구조는 작가의 성실성마저 의심스럽게 만든다.
작품 마무리 단계에서 작가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말도 들리지만 그것은 정말 하지 않음만 못한 변명이다.
미완성된 도자기를 깨 없애는 도공의 정신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독자는 출판을 조금 늦추더라도 완성된 작품을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어하는 작가를 원한다.
몰아치기식으로 대충 종결지어서라도 책을 하루빨리 찍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무협 시장의 현실임을 인정하기는 더더욱 싫다. 설봉의 작가적 역량을 인정하기에 사신의 허술한 결말을 더더욱 꾸짖을 수 밖에 없다.
여러 말을 했지만 작가 '설봉'과 작품 '사신'에 대한 내 평가는 변함이 없다.
'훌륭한 작가'가 쓴 '썩 잘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다.
실력있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욕심은 아무리 과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신에 대한 이 긴긴 비평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에 대한 나만의 애정표현이기도 하다.
작가 '설봉'.. 그의 새로운 작품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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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바람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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