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운의 <도살객잔>과 <무림맹연쇄살인사건>을 연속으로 읽고 난 후 느낌을 메모했었는데, <비정강호>에 대한 감상이 올라와 있기에 대략 간추려 봤습니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부러워요...(이하 존칭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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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버 경감
조이스 포터 여사가 창조한 세계 최고의 무능탐정 도버 경감...
본명은 윌프리드 도버로 명탐정 중 최악의 외모를 지닌 인물로 런던 경시청 범죄수사과 주임 경감이다. 경시청 내에서도 모두가 싫어하는 골칫거리로 체중이 110kg이나 나가며, 기름기 흥건한 얼굴에 조그마한 들창코, 돼지처럼 부르튼 입, 작은 눈, 히틀러와 같은 모양의 콧수염을 지녔다. 게다가 음험하고 소심하고 얼간이이고 질투심이 강하며 횡폭하고 대단한 심술쟁이이다.
만성소화불량이면서도 대식가라서 가는 곳곳마다 염치없이 음식을 반강제로 빼앗아 먹고, 게으름도 심해서 조금이라도 비나 눈이 오면 꾀병을 부려 수사를 쉬고 머크리거 부장형사에게 수사를 시킨다.
수사가 부진하여 귀찮아지면 다짜고짜 아무나 지목하여 유치장에 넣어버리고 반발하는 부하들은 직무 태만으로 몰아붙인다. 증거는 나중에 아무렇게나 만들어버린다. 이런 터무니없는 수사가 오히려 범인의 넋을 빼놓아 의심과 불안을 심어주어 결국 꼬리가 잡히게 된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진범을 잡으면 도버 경감 역시 어쩔 줄 몰라 한다.
한상운의 <도살객잔>과 <무림맹연쇄살인사건>의 주인공 '만화량'을 보면서 내내 도버 경감을 떠 올렸다. 금승위라는 조직 내에서 손가락에 꼽는 뛰어난 포두로 인정받는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눈앞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부하 부려먹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만화량... 야비하고 잔머리 굴리는 거로는 도버경감보다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 거기다 여자 밝힘 분야에서는 한층 더 우위인 느낌.
2. <도살객잔>의 허무한 결말
<도살객잔>에서 사건의 회상부분은 사실의 영역이고, 그 외의 부분은 만화량 개인의 영역이다. 그러니 허무하다고 알려져 있는 결말도 그렇게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만화량이 받은 임무는 금승위의 이인자를 죽인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청(吳淸)'이란 이름을 지우고 오는 것이었고 심지어 그 이름을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까지 지우는 것이지 않는가?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았는데 그만 그 범인이 죽어 버렸다... 그러니 거기서 소설이 끝나버린 거다.
범인을 죽인 사람이 나오긴 하지만 만화량의 입장에선 그 사건은 자기 소관이 아니다. 대부분의 추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사명감에 불탄 주인공이 그 사건을 자기가 맡겠다며 발악을 하지만, 만화량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럴 인간이 아니란 말씀. 결국 '오청'이란 이름을 본 사람들을 마무리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끝이 난다. 두 권짜리 소설이 한 권 더 나아가도 될 듯한데 끝나 버리는 것이다.
아마 만화량 입장에선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겠지? 추운 계절이고... 있어봐야 돈도 안되고... 눈독들인 여자도 죽어 버렸고...
3. 이제 더 이상 '만화량'은 없다!!!
한 작품을 읽고 나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그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문득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대도오와 대도오를 따라간 사람들은 뭘하고 있을까? 포이종은 그의 검도를 완성했을까? 조자건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도전을 받지 않을까...
한상운은 그러한 궁금증을 근원부터 없애 버렸다. <도살객잔>에서 만화량을 돕던 저승사자들은 <무림맹연쇄살인사건>에서는 모두 죽는다. 아니 작가가 모두 죽여버렸다. 만화량의 머리의 한부분이었고 수족이었던 그들이 죽고 만화량은 효린과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듯한 결말로 봐서는 이제 만화량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은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다.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어 고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4. '똥'은 또 왜 그리 자주 나오는지...
<독비객>에서도 그러더니(양각양을 아직 못 봤다.) 이젠 아예 대놓고 '똥'을 잡아넣는다. 똥 속에 숨고, 똥 속에 묻히고... <독비객>에서 변괴(便塊)와 변수(便水) 장면을 모처(?)에서 보는 바람에 느낌이 배가된 경험이 있어 그랬는지, <도살객잔>과 <무림맹...>에서는 똥 이야기가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책을 멀리 했다.
내 일곱 살짜리 둘째딸은 아직도 똥 이야기만 나오면 깔깔 넘어간다. 혹시 독자들을 그 나잇대로...?
그 외 효린의 묘사...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웃을 때 눈이 반달이 되는 여자. 야성미와 섹시함을 함께 갖춘 여자. 그러면서 약간은 머리가 비어있는 듯한 분위기. 그런데 이름이 효린이라니... 효리가 아니고? 작가의 이상형인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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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은, 한번 보면 두번 다시 보고싶어지지 않습니다. 범인이 누군지 알고 나면 나중에 다시 봤을 때 흥미가 거의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죠. 한상운의 추리무협도 그럴 위험성이 있지만, 제 생각에는 안 그럴 것 같습니다. 한상운 특유의 비틀기와 해학이 녹아 있는 문장들을 다시 한번 곱씹고 싶은 충동이 지금도 일기 때문이죠.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능력 하나는 정말 탁월한 사람입니다. 이젠 하드보일드죠? <비정강호>...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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