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대형 설서린 1. 2권
작 가 : 설 봉
출판사 : 청어람.
출판일 : 2003년 5월 30일
현재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되는 설봉은
어느덧 중견(中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기 있는 무협작가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나름의 퀄리티가 보장되는 작품을
쓴다는 얘기고, 대여점에서 책을 선택하는데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게
만든다는 얘기다. 하지만. 하지만 서점에서 책을 사야 한다면???
그렇다면 대여점에서 빌릴 때처럼 전혀 망설이지 않고 책을 고를 수 있을까?
설봉의 최신작 [대형 설서린]을 읽으며 위의 질문에 고개를 젖는다.
그런 부정적 견해를 가지게 된 배경에는 그의 최근작들이 같은 선상에
서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신]으로부터 [추혈객], 그리고 [대형
설서린]에 이르는 최근의 작품은 각각의 독특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두루뭉실
뭉쳐져서 한가지 맛으로 다가온다. 왜 그럴까?
가장 커다란 공통점은 작가가 글을 쓰는 시점이다. 1인칭이나 2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의 한가지 포맷을 꾸준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그 셋이 교묘하게
어우러진 시점을 이용하여 글을 이어 나간다.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이 일인칭
시점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조연의 독백과 생각으로 연결
됐다가 어느 순간 작가의 관점에서 등장인물들이 움직인다. 세 작품 모두에서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장면의 묘사는 한결같이 1인칭의 시점을 사용한다.
이러한 복합시점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장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1인칭 시점의
장점은 누가 뭐래도 감정표현의 자유로움이다. 특히 몰입도가 강해야 하고 긴장도가
높아야하는 장르문학의 특성상 주인공의 감정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때 1인칭 시점보다 좋은 것은 흔치 않다. 하지만 이야기의 커다란
틀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복합 시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세 작품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것이 주석(註釋)혹은 주해(註解)인데,
그런 주석을 바라보며 받는 느낌이 참으로 묘하다. 어렵게 자료를 찾아 독자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배려는 가슴에 와 닿지만, 그것이 작품 속에 녹아있지
못한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석과 논문에 매달린 주석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는 법이고, 그래서 알고 있는 사실의 3할만 작품에 활용하란 얘기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7할은 감추고 3할만을 작품에 사용하라는 얘기를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얻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부를 사용하는 것이 논문이라면
적당하게 얼버무려 넣는 것은 소설이라는 얘기다. 설봉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석은,
그런 의미에서 논문에 매달리는 주석의 느낌이 다분하다.
어쩌면 이러한 복합 시점을 사용한다던가,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하려는 배려는
설봉이 가지는 작가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무협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1년
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를 꼽으라면 설봉이 그 첫 번째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사신과 추혈객이 함께 발간됐고, 대형 설서린과 [천비팔독수]라는
작품을 함께 쓰고 있으며, 고무림에 [가령지곡]을 연재하고 있다.
왕성한 활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설봉이라는 중견작가에게 실망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하다.
코드가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다. 무협이란 남녀노소 누구나 즐겁게 읽는 장르가
아니다. 여자보다는 남자가 월등하게 많은 독자이며 중장년 보다는 청소년이
압도적 우세를 보인다. 이러한 독자층의 구분법에 이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장 많은 독자층이 존재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무협을 쓰기로 마음먹고
글을 쓰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물론 개인적 견해다.
그 예로 [독왕유고]나 [산타]를 읽고 난 후의 느낌과 최근작을 읽은 후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코드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청소년들이 가지는 느낌이 무협의 주류, 혹은 대세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의 무협은 그들의 기호를 따라가야만 생존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내가 가진 무협의 기호는 일부 특정 소수의 색다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기존의 독자들로부터도 사랑 받으며, 새로운 독자들로부터도 환영받는 작품을
쓰는 것은 힘든 일일까?
최근의 무협시장을 보면 양적으로는 꽤나 발전하는 모습이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좋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질 만큼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 실망하지
않을 만큼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작가 중 한사람이 설봉임에는 분명하다. 최소한
1권을 끝까지 못 읽게 만들지는 않는다. 대형 설서린도 3권이 기다려질 만큼은 된다.
그러나.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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