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품명 : 설국
출판사 : 민음사
[눈의 나라로의 초대]
누구나 가끔씩 일탈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추천해주고픈 책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선생의 명작, <설국>이다.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 p.7
이 소설의 무대는 나고타 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이다. 온천에 출입하기 위한 기차는 군마 현과 나고타 현을 지난다. 이를 이 소설에서는 ‘국경’ 이라고 서술하는데, 이 생소한 어휘가 사용될 때마다 독자는 마치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마치 진짜 눈의 나라로 진입하는 듯한, 일상의 단절, 일탈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일탈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뿐만이 아니라 기묘한 서정까지도 한께 느끼게 해준다. 이는 눈의 나라와 온천, 그리고 아름다운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가 어울려 빚어 내는 환상이다. 그 기묘한 몽환夢幻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눈의 나라에서 홀연히 돌아올 때이다.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에 엷은 빛이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설국>, p.75
개울을 따라 이윽고 너른 벌판으로 나오자, /중략/ 달은 아직 흐릿하여 겨울밤의 차고 깨끗한 느낌은 없었다. -<설국>, p.76
눈의 나라를 가르는 국경을 지나는 순간 서정적인 꿈은 깨어진다. 소꿉친구의 죽음을 외면하며 배웅해 주는 여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차가운 눈송이들, 높게 뻗어나간 겨울나무들, 시리도록 아름다운 달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또다른 서정]
이 시를 관통하는 ‘눈雪’ 이라는 소재에 서정성을 더해주는 것은 온천의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이다. 이 둘의 시마무라에 대한 사랑은(불확실하긴 하나) 부모의 유산으로 놀고먹으며 허무함의 기, 현실에서 붕 뜬 듯한 기묘한 느낌으로 세상을 사는 시마무라를 때때로 현실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나 시마무라가 상징하는 자연의 무상함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은 보답받지 못하고 눈송이처럼 허공을 떠돌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더한 애잔함을 느끼게 된다. 이미 두 번째 만남에서 소꿉친구(요코의 애인인)를 읽은 고마코, 애인을 잃고 자신을 데리고 돌아가달라 말하는 요코, 이 둘은 서로 대비되며 시마무라를 끌어당기지만, 글 전체를 아무리 읽어 봐도 그 사랑이 이루어질 듯하진 않다(게다가 시마무라는 기혼자이다!). 결국 시마무라는 거울처럼 그들의 사랑을 비추어 주는 형상으로서만 존재했다. 어찌 보면, 작품 서두에 등장했던 ‘열차 창의 거울’ 요코와 고마코의 안타까운 사랑을 위해서만 예비되어 있었던 듯하다.
[불친절한 거작巨作]
이 책은 가끔씩 드문드문 등장하는 아름다운 묘사들만으로도 충분히 서정성을 느끼게 해주지만, 역시 문학 작품답게 부분 부분의 기술이 만만치 않다.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가 줄거리를 놓치는 일도 빈번하다. 단순한 한 문단 사이에 1년이라는 기간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시마무라는 그리 친절한 주인공도 아니기에, 독자로서는 무슨 생각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덜렁대는 독자는 사건의 파악도 쉽지 않은 것이다.
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 와보니 아니나다를까, 여관 방 처마 끝에 매단 장식등에는 옥수수 빛깔의 커다란 나방이 예닐곱마리나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옆방 옷걸이에도 작지만 몸집이 통통한 나방이 앉아 있었다. -<설국>, p.77-78. (위의 서술이 시마무라가 1년 만에 돌아왔음을 기술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난제는 독자가 여러 번 설국을 읽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인 주관이지만 세 번 이상 읽으면 맥락이 잡힌다. 그러나 주된 이점은 이러한 줄거리 파악 이외에도 설국의 우아한 문체를 다시금 음미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일 것이다. 그 와중에 설국에 대한 이해 또한 더욱 깊어진다.
방금 나온 고마코의 방조차 이미 그토록 먼 세계인 양 여겨진다.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라며 정신없이 산에 오르는데, 여자 안마사가 걸어가고 있었다. 시마무라는 무언가에 매달리기라도 하듯, <안마 좀 해주겠나?> -<설국>, p.51-52. (요코와의 만남, 고마코를 떠올림, 눈 산의 서정이 일체가 되어 기묘한 이질감을 느낀 시마무라가 현실로 귀환하고자 안마를 청한다.)
[감상]
겨울에 읽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가을에 몰아서 읽었고 ,묘사가 드문드문하기에 몰입 또한 쉽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얕은 독서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다. 한국어로 읽었기에 그런 것일까, 일본어의 운율이 가지는 독특한 묘미도 맛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일어를 할 줄 아시는 분은 일판으로 읽으시길 권한다. 그러나 그런 난점을 제하고도 너무나 아름답고 여운이 남는 묘사가 많아, 모두 인용하여 적고 싶지만, 염치없는 짓인 줄 아니 금하려 한다. 마음에 어딘가 시린 곳이 생긴다면, 다시금 꺼내 볼 책이 될 것 같다.
* [설국]은 다른 번역판을 하나 구해서 같이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 외의 서정적인 일본 문학(소설도 괜찮습니다) 추천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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