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김탁환
작품명 : 나, 황진이
출판사 : 푸른역사
모든 것 하늘과 땅에 맡기고 스스로 부침하며 만물 밖에 노닐기로 해요. 흔적 없이 깔리는 어둠처럼. 그 어둠을 뚫고 지나기 위해 쉼 없이 철철 거리는 시내처럼. 그 위로 아득히 흘러가는 복사꽃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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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잘 모르는 분들. 그래서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책의 첫 장을 읽고 느낀 감상은 이랬습니다.
“헉.”
너무나도 여성스러운 문체에 당황했습니다. 저자의 이름은 김탁환 인데! 여자 치고는 너무 터프한 이름이 아닌가? 검색해 보니 과연 남자. 그것도 나이 지긋한 중년의… 저자가 여자였다면 좀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아쉬움이 남네요…..
글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허태휘가 그들의 스승인 서경덕과의 사별 후, 스승의 문집을 만드는데 참조할만한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 달라고 황진이에게 부탁 합니다. 황진이는 스승 서경덕과의 만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 전체를 조망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싶지만…아무튼 그런 필요를 느끼고 무려 50년!! 남짓한 삶을 회고하기 시작합니다…..결국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천랑성! 바깥세상을 알면 알수록 슬픔이 눈덩이처럼 커지며 유일한 해결책은 골방에 가두고 만두만 먹여서 그 기를 꺾는 것 뿐! 이라는 무시무시한 별자리. 그 별자리에 태어난 아이가 황진이입니다. 역시 출생부터 남다릅니다. 가계 또한 범상치 않습니다. 외할머니의 동생인 속칭 새끼할머니 진백무는 송도제일의 춤꾼이자 관아의 우두머리 기생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진현금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지만 가야금의 명인! 송도제일의 뮤지션입니다.
자란 환경이 이렇다 보니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화류계의 엘리트 코스를 차근히 밟아갑니다. 타고난 재능, 훌륭한 교사들로 인해 그녀는 이미 어린 나이에 또래에서는 둘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오릅니다. 하지만 천랑성의 아이는 만족할 줄 모르고 페미니즘을 부르짖습니다. 결국 그녀는 외숙부를 졸라 글을 배우고, 시를 외며, 법전까지 독파하게 됩니다.
화류계에 데뷔한 이후에도 그런 그녀의 성격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하늘을 뒤엎을 이상과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고뇌하던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이 바닥의 탑이 되어보자꾸나.’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범인은 사절. 한가지라도 특출 난 재주가 없다면 그녀는 만나 주질 않습니다. 가시가 장미를 더욱 돋보이게 했던 걸까요? 자칭 시 좀 외우고 악기 좀 다룬다는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도전하지만 참패를 당합니다. 송도의 거부들은 집 한 채 값을 주고 그녀의 얼굴 한번 보기를 청합니다. 그녀는 청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 버는 재주가 탁월하다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의 거상들과 오빠동생 하는 사이 그녀는 준 재벌이 됩니다.
세간의 이목과 관심 속에 바쁜 날들을 보내던 황진이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터집니다. 새끼할머니 진백무가 실종되고 그로부터 얼마 후 강에서 고기에 뜯긴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자살을 한 것이지요. 황진이는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할머니의 시체에서 훗날 자신의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외숙부는 이러다 애 죽겠다 싶어 그녀를 데리고 산으로 기분전환을 하러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진이는 첫 사랑이 될 이사종을 만나게 됩니다. 재주를 무엇보다 아끼는 황진이는 풍류남 이사종의 노래에 홀딱 반하고 그와 러브러브를 하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황진이는 그와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러기를 3년.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행복은 불현듯 찾아온 또 한번의 비극에 의해 가로 막힙니다.
어머니 진현금이 매독에 걸린 것입니다. 황진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병이 한참 진행되어 어머니는 알아보기조차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여태 모은 재산을 죄다 부어 온갖 치료를 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떠나고,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 황진이는 이사종과 이별을 하게 됩니다.
두 이별을 가슴에 묻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황진이는 가을바람 불어오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두 번 째 만남을 갖게 되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남자와의 묘한 여행은 시작됩니다. 여행은 기행이었고 고행이었습니다. 험한 산속에서 도적떼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배고픔에 몸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두 남녀는 그렇게 폐인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의 여정도 막바지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이별을 고한 쪽은 남자였습니다. 이름을 버렸다던 그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황진이를 떠나갑니다.
황진이는 송도로 돌아가 다시 거문고를 잡습니다. 그 유명한 지족선사와의 스캔들이 터진 것도 이 무렵입니다. 황진이는 그저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뿐 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만남이 있은 지 몇 달 후 고승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지족선사는 파계를 하게 됩니다…..
지족선사와의 만남 직후 그녀는 마침내 서경덕을 만나게 되고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서경덕의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하지만….. 서선생님은 결국 조연일 뿐이니 자세한 내용은 패스…ㅋㅋ
위에 요약한 줄거리에서는 들어나지 않을 듯 한데, 소설에선 황진이가 해탈을 참구하는 도인처럼 그려집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글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문체로 유려하게 쓰여진 글은 마치 한편의 긴 시를 읽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 덕에 굴곡진 인생의 다이나믹한 맛은 좀 죽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간 황진이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들, 탐미적인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 그리고 춘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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