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우명
작품명 : (주)21th 테크노 르네상스
출판사 : 중앙books
스크롤 압박 죄송합니다^^;
0.
<(주)21세기 테크노 르네상스(이하 르네상스)>는 마치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노트북을 다루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과거의 지구에는 무공과 마법이 실존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며, 초월자의 실재, 영혼이나 기(氣) 따위의 동양 판타지적 요소 등을 설정함으로써 환상과 현실 사이에 통로를 뚫었다.
이 작품은 뛰어난 작품이라 보기는 힘들고, 또한 주목받을 가치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독특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에 대한 감상에 약간의 평을 곁들이고자 한다.
1.
<르네상스>의 주인공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 고아로 지낸 소년기,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낸 29세의 남성, 정치와 경제에 관심이 많은 대한민국의 국민.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은 세상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할 수 있는 힘(작중의 노트북)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평범하게 남았다는 것이다. 물론 신체 능력이 비상식적으로 상승되고, 입이 벌어질 정도의 돈을 벌었으며, 유명세를 톡톡히 타면서 명예까지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작품에서 주인공을 여전히 평범한 남성으로 보이게 한다.
주인공은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주인공을 평범하게 취급한다. 조금은 게을러지고, 능청스러워지고, 잘난 척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실수 연발에 노트북 의존성이며 레벨업을 지향하는, 평범한 남성이다.
이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엿보면 조금은 재미있는 추측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라면 저런 굉장한 힘을 얻었을 때 어떻게 사용할까? 30대에 접어드는 평범한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저자는 주인공의 행동원리 설정에 매우 충실하다. 주인공의 성격뿐만이 아니라 행동원리에 입각한 전개, 저자가 집필하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2.
<르네상스>가 주는 재미는 통쾌함이다. 어째서 재미있는가 하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주인공과 같은 힘을 얻으면 동일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독자가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기 용이하며, 그에 의해 간접체험 및 대리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절대적인 힘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평범한 주인공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또한 주인공(=주인공에 감정이입한 독자)의 행보를 거침없이 이끎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 행보에 당위성을 부여하여 소설의 본분에 충실했다.
인과에 충실하면서도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글, 그러면서도 저자의 사상이나 주인공의 신념에 입각한 인과, <르네상스>는 말초적이기는 할지언정 분명 재미있다 할 수 있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서는 원초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3.
<르네상스>의 사건 발생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사건의 발생의 주체가 주인공이라는 점, 그리고 그 원인이 다분히 작위적인 설정에 의한 우발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학교 폭력에 대한 뉴스를 보고 화가 나는 것은 대다수의 평범한 어른의 당연한 심리다. 여기에 '힘'을 가진 주인공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악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침묵하는 것 또한 악이라 하지 않던가, 저자는 이 평범한 논리에 지극히 충실했다. 다만 엄밀히 말하여 '주인공이 뉴스를 본 것'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주인공에게 뉴스를 보여준 것'이라는 게 소설로서의 문제점이다. 이는 이후의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언뜻 주인공은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하며 사건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주인공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저자가 이끄는대로 끌려다닌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미흡했다. 무릇 소설은 우연에 의지할수록 개연성이 끝없이 추락하는 바, 저자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끌기보다는 주인공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학교 폭력과 관련된 사건을 이전에 겪었다든지, 또는 최근 학교 폭력을 목격했다든지, 또는 친인이 학교 폭력을 겪었다든지, 그도 아니면 학교 폭력과 관련된 사건을 최근에 자주 들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힘을 얻었다고 우발적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은 또한 돌발적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저자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이후의 기적의 농작물이나 대공명 이론 등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작위성의 문제, 저자가 열어준 길을 당연하게 걸어가는 주인공, 이것을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4.
<르네상스>에서 보이는 주인공은 현대 한국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다. 이는 소설적으로 바람직하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행동하는 약자, 그리하여 현실은 옳지 못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다수를 호도함으로써 주제를 외치는 주인공. 소설적으로는 더없이 훌륭하다. 물론 주인공이 약자는 아니지만.
이러한 주인공을 설정한 저자를 향해 찬사를 던지는 것은 독자의 당연한 권리라 하겠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주인공의 뒤에 드리운 저자의 그림자는 그에 비해 그리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현실의 수입 쇠고기 파동이며 삼성 그룹 파문 등을 거의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주인공이라니, 보기에 좋지 못하다.
저자의 사상을 주인공을 통해 직접 드러내는 것은 물론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비판의 대상의 현실의 직접적인 객체여서는 곤란하다. 주인공이 비판하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현실의 사건을 주인공(주인공의 모습을 빌린 저자)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소설의 역할이라 말하기 어렵다.
정권의 문제나 대기업의 문제 등을 개념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개념의 문제가 소설의 세계(허구)에서도 역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소설의 전개와는 큰 관계가 없는 현실의 사건을 직접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5.
<르네상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건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커다란 사건의 영향을 받는 작은 사건이 실로 무수히 많다. 차마 세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질 만큼, 저자가 '나비 효과'를 언급했을 정도로 그 여파는 크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그 여파를 감당하기엔 너무나 작은 이야기다.
주인공이 일으킨 사건은 터무니없이 크다. 사건의 배경을 세계 무대로 설정할 정도로, 그 규모는 지극히 크며 영향력 또한 대단하다. 당연히 그에 영향받는 인물이며 배경 또한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주인공의 행동의 결과가 연쇄적으로 일으킨 다른 사건의 원인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즉,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지적 작가인 저자는 주인공과 동일한 관점에서 존재하기에, 소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필요한 최소한만 언급했을 뿐이다.
이는 자칫 <르네상스>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추락시킬 수 있다. 소설은 '거짓이나 그럴싸한 이야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장치 없이, 다만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는 설정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엔 주인공이 벌인 사건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 주인공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으면 개연성이 무너지게 된다.
소설의 세계는 변화한다. 주인공의 행보에 따라, 저자가 주입한 설정에 따라, 소설의 세계는 인과관계에 충실히 따르며 천변만화한다. 이에 대처하지 않고서는 개연성의 저하를 피할 수 없다. 개연성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만을 따지는 게 아니라 당연히 일어나야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6.
<르네상스>의 주인공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그는 사상가가 아니며,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사상적 기반은 빈약하다 할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주어진 날카로운 칼, 작중의 신의 노트북은 과연 그러한 것이다. 주인공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는 힘이기도 하며, 또한 주인공을 끝없이 타락시킬 수도 있는 힘이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힘을 소유하면 일신의 편의와 이기적인 바람을 추구하며 타락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높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주인공은 고아로 자랐으며, 고아원의 원장 선생님에게 올바른 교육을 받았고, 또한 비교적 초반의 사건을 통해 연인이 된 '현아'라는 인물에 의해 좋은 목적으로 힘을 사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물의 설정만으로는 지극히 부족하다. 주인공은 인도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독선적이다. 그에게 원장 선생님과 현아의 존재는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하며, 역시 그것만으로는 사상적 기반이 탄탄하다 말하기 곤란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소설은 사건을 통해 주인공을 변화시키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그렇지 못하다. 주인공은 이미 정신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인물이며, 다만 주인공의 독선이 일반적으로 '옳다'라고 여겨지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르네상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다분히 사상적인 사건이 아니기에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며, 주인공의 사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건의 발발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개연성의 저하를 부르고 말 것이다. 이렇게나 규모가 큰 사건을 계속하여 일으키는 주인공이라면 단단한 사상에 기반하는 고차원적인 고민을 해야 할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7.
<르네상스>는 주인공 중심적인 글이다. 글의 시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전지전능한 작가인 저자는 주인공을 주목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주인공에게 붙들어 두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르네상스>의 주인공은 이미 완성된 인물이다. 변화하지 않는 인물이기에 주인공 자체는 아무런 재미도 없다. 즉, 독자가 재미있어하는 곳은 주인공 자체보다는 주인공이 일으키는 사건이라는 의미다.
이리 되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 이끌어낼 수 있는 재미는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인물의 내면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시점이건만, 관점이 주인공에게 머물러 있는데다가, 그 주인공마저 변화하지 않는 완성된 인물이라니.
완성된 인물인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이 주체인 사건, 그리고 주인공의 행동에 독자를 집중시키려는 저자의 의도, 이 모두에 부합하는 시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르네상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야 했던 글이다.
굳이 말하면, <르네상스>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야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저자의 편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시점은 단순히 글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시점은 글의 재미를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저자인 우명은 이 점에 대해 미흡했다.
8.
<르네상스>는 분명 범작이다. 주인공은 소설적으로 적합하나 변화하지 않기에 또한 마땅치 않다. 사건의 규모는 크나 조밀하지 못하다. 문장은 매끄러우나 관점은 적절치 못하다. 재미있는 글이나 뛰어나지는 못하다.
그렇기에 <르네상스>는 범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글이다. 그러나 독특하고 또한 재미있다. 글쎄, 이로써 충분하지 않을까.
저자에게는 <르네상스>가 처녀작일 뿐이다. 다음 작품은 분명 이보다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본 감상이 저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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