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성상현
작품명 : 일월광륜(日月光輪)
출판사 : 파피루스
0.
<일월광륜>이 전 7권으로 완결되었다. 본래 '중화'라고 하는 특이한 소재를 다루던 글이었고, 끝이 매우 깔끔하여 인상이 깊이 남았다. 본인에게 있어서는 잊기 힘든 작품으로 남을 터다.
그렇다면 겨우 권당 800원에 불과한 돈으로 <일월광륜>을 이리 즐거이 읽은 본인이 저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밖에 없을 것이다. 내 즐거움을 타에 알리고 평을 하여 저자에게 닿게 하는 것, 평쟁이임을 희망하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일일 것이다.
1.
<일월광륜>은 장르의 구분상 무협에 속한다. 무릇 무협이란 무(武)와 협(俠)을 일컫는 것인즉, 무는 강함이요, 협은 호방하고 의를 숭상함을 말한다.
무는 드러내기 쉬운 것이나 협은 어려운 것이다. 무는 세 치 혀를 놀려도 그려낼 수 있으나, 협은 세 치 혀를 놀림으로써 가라앉고 만다.
<일월광륜>의 저자인 성상현은 주인공인 이현을 통해 '이것이 의(義)다.'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부르짖는 의는 곧 옳은 것을 뜻하니,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고자하는 곧은 협의(俠義)야말로 저자가 그려내고자 하여 글에 녹여낸 모든 것이었다.
이 점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를 추구하게 하였으며, 쉼없이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물었다. 이 우직한 저자는 협의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칠성권신 이현'이라는 주인공이다. 온갖 고난을 견디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올곧이 의를 추구한,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옳음을 위해 생명을 불사른 고매한 인물.
저자는 주인공을 통해 독자에게 말한다. 이것이 의(義)다. '이현'의 말과 행동, 독자 여러분이 보고 떠올리는 그것이 바로 의(義)라고. 한결같이 옳음을 바라본 주인공과 그 주인공에게 시련을 안겨준 저자, 처음과 끝이 여전한 이 둘에게 찬사를 던진다.
2.
주인공의 행위를 가리켜 '멋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감상하는 이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의 눈에는 의롭기보다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좋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을 하는 입장에서 단호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적어도 저자는 멋진 소설을 썼다, 라고 말이다.
대저 소설의 주인공은 약자다. 어째서 약자인가를 논하면 사상적으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특이하다'라고 일컬을 수 있으며, 바로 그 특이함이 다수에 의해 핍박받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모두가 오리인 곳에서 백조는 미운 아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에 속하는 주인공은 항상 외쳐야 한다. 나는 틀리지 않다, 나는 다수인 너희와 다르지 않다. 이것을 다수의 앞에서도 외침으로써 주인공은 주인공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이 바로 클라이막스, 주제가 드러나는 시기가 된다.
<일월광륜>을 보라. 이 지극히 소설다운 구조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주인공인 이현은 수많은 사람을 만남으로써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성찰하였으며, 그렇게 천천히 계단을 오르듯 완성된 인물인 주인공 이현은 무림맹과 마교, 게다가 무룡왕부라고 하는 상대적 다수를 향해 주제를 말했다. '이것이 의(義)다.'라고.
G.루카치가 말한 '문제아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 완벽히 부합되는 주인공, 그 주인공을 성장시킨 수많은 완결된 인물(조연)들, 완결된 인물들이 보여주는 절대다수들의 어긋난 현실과 모순, 현실을 개혁하고자 바라게 되는 주인공, 그로 인해 성장하여 완성된 주인공이 터뜨리는 클라이막스, 그리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의도와 주제. 이 얼마나 소설적인 구조이며, 소설적으로 완성된 글인가!
3.
저자는 <일월광륜>을 빌어 절대적인 악(惡)은 없다, 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정의를 추구하였으나 현재는 타락한 무림맹, 중화의 칼끝이 향하고 있으나 실상은 가족들을 아끼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뿐인 마교, 중화의 눈길이 닿지 않기를 바라는 천축, 그리고 그 모두를 스스로 제어하고자하는 황실, 마지막으로 그들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 화합하고자 하는 주인공.
절대적인 악은 없다, 이는 진실로 옳다. 그 하나하나의 세력은 모두 자기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옳다 생각하고 적을 그르다 여기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누군가가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함을 표현하고자 주인공이라는 인물을 빌어 그들 모두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였다. 조금만 양보하면 우리 모두가 싸우지 않고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라고.
그러나 저자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절대악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황룡검 주무를 잃은 무룡왕부, 그 세력이 더이상 정의를 갖지 못하게 되고 말았음이 오히려 저자의 뜻에 위배되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주인공은 무림맹과 마교 사이에 다리를 놓았으나 결국 황실과는 척을 짐으로써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 아니, 황실이라는 세력을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 결함을 자아냈다는 것이 저자의 패착이다. 깔끔한 결말이긴 했으나, 결코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4.
<일월광륜>은 인물, 사건, 구조 등에서 굉장히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글이긴 하나, 본인의 눈에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5권에 등장했던, 북해빙궁에 대한 일이다. 역사적 고증이 부족했다는 점이 심히 안타까운 설정이었다.
<일월광륜>은 북해빙궁을 러시아인(슬라브계 백인)의 세력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바이칼 호수는 만 년도 더 전에 이미 몽골로이드인 황인의 터전이었으며, 슬라브인이 시베리아를 동진하여 바이칼 호수에 이른 것은 원대 이후의 일이다. <일월광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해빙궁을 바이칼 호수에 인접한 슬라브인의 세력이라 설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역사 고증에서 오류를 빚어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황인의 터전인 바이칼 호수에 자신들과 전혀 다르게 생긴 벽안 백피의 서역인이 궁전을 짓고 세력을 키우는데 수백년이나 묵인해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슬라브인이 동진한 것이 원제국이 몰락하고도 100여 년이나 뒤의 사건임을 상기할 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저자의 설정이 오류였음에 분명하다.
조금은 아쉬운 일이다. 이야기는 굉장히 잘 꾸며놓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역사와는 조금 거리가 먼 저자의 실수라고 생각된다.
5.
<일월광륜>은 적어도 소설적으로는 완성도가 뛰어난 글이다. 7권까지 늘어놓은 사건들이 클라이막스에서 모두 해결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주제가 드러났고, 또한 미흡하게 끝난 서브 스토리도 없다. 모두가 정리된, 그야말로 얄짤없이 '완결'된 이야기다(마교와 무림이 결국 화해하지 못했음은 물론 아쉬운 일이나, 그 역시 사건이 완결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소소한 결함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장렬한 절정이었으며, 깔끔한 결말이었다. 잔향이 조금 씁쓸해서 음미하기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7권까지 오는 동안 가슴 벅차도록 옳음을 강조한 주인공과 그에게 투영된 저자의 모습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즐겁게 읽기에 모자람이 없는, 좋은 글이었다. 이 좋은 글을 세상에 내보낸 저자에게 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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