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박정수
작품명 :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
출판사 : 드림북스
미리니름이 상당하니, 가급적 백스페인스에 손을 올려두시길 권합니다.
0.
마법사가 무공이 횡행하는 무림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의문으로 시작된 '마법사 무림에 가다'라는 책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무림의 고수들이 판타지 월드로 이동하는 퓨전 판타지는 꽤 많았으나, 그 반대의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였기에 당시에는 굉장히 신선한 소재였다. 물론 이는 현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판타지 월드에서 무협으로 넘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는 '마법사 무림에 가다'의 저자인 박정수의 신간으로, 출판사인 드림북스는 이에 대해 소재는 같으나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 역점을 두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드림북스가 선정한 책이니 설마하니 재미없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논하면 나올 만한 이야기가 꽤 많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에 대해, 이벤트를 겸하여 장황히 늘어놓고자 한다.
1.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 이 제목부터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마법사 무림에 가다'에서 단 한 글자만을 추가했을 뿐인, 좋게 말하면 동일한 소재의 글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전작의 덕을 보겠다는 내심이 적나라하게 비춰진 제목이다.
칭찬할 점은 제목과 내용의 일치성이다. 무림에 존재할 리 없는 흑마법사라는 존재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킬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용을 기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목이다.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을 찾기 힘들 정도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제목은 시장성을 고려했다는 점이 너무나도 훤히 보인다. 내용과 제목의 어울림을 논하기 전에 이미 전작의 후광이 비춰버린다. 더구나 저자마저 동일한데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전작인 '마법사 무림에 가다'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반드시 손이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 좋은 제목이다.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라는 제목은 분명 그 자체만으로는 더없이 훌륭한 제목이다. 그러나 전작의 흥행을 고스란히 이어받겠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뻔히 보여 괘씸하기가 이를 데 없다.
2.
출판사인 드림북스는 동일한 소재를 다루었으나 밀도와 완성도를 높였다고 소개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밀도와 완성도에 눈이 가겠으나, 평을 하는 입장에서는 동일한 소재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기실 소재가 동일하다는 점은 그다지 나무랄 일이 못 된다. 본디 소설에게 있어 소재란 정작 중요한 주제와 내용 전개의 도구에 불과할 뿐, 비록 소재가 같다고는 하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는 본인의 기대의 반대편으로 진행되었다.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는 적어도 발상 면에서는 '마법사 무림에 가다'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판타지 월드의 (흑)마법사가 의도치 않게 무림에 떨어지고, 기존에 익히고 있던 마법과 무공을 접목시켜 무림 고수를 마법으로 제압한다. 그 과정에서 무림인은 마법의 존재를 무공의 하나로 인식하며, 마법사가 선보이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정파가 마교로 바뀌었고, 단전에 서클을 형성하며, 강시를 데스나이트로 만드는 등의 새로운 소재가 등장했다 하나,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후속작,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아류작이다.
3.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에서 가장 문제가 큰 부분은 시점과 구조다. 전지적 작가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의 관점은 시종일관 주인공의 곁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 주인공에게서 떨어지더라도 결국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써의 서술일 뿐이다. 오로지 주인공에게만 집착하는 서술자는 결국 독자에게 한 가지를 시사한다. 이 글은 오직 주인공을 위한 글이다- 라고.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의 구조적 문제는 시점의 문제와 동일선상에 있다. 가장 문제시 되는 부분은 주인공인 마현이 소설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에 비친 현실은 점차 변화한다. 거지에서 주인공이 꺼려하는 도사들의 앞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마교로 가지만 마교 안에서도 점차 환경이 변하며 주인공이 만나는 인물들이 바뀐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완성된 인물이다.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리고 당연히 주인공을 변화시켜려 하는 완성된 인물, 즉 조연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전생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 변함이 없다. 냉혹한 흑마법사에서 점차 바뀌어 가는 주인공의 심성에 가장 주력했다고는 하지만, 사리분별 및 목적하는 바에 변함이 없으니 주인공의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다.
이미 미래상이 정해진 주인공에게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저자의 목적이라는 점은 꽤 아쉬운 일이다. 무림이라는 배경이 사건에는 연동되건만 인물과 연동되지 않는다는 점은 소설적 구조의 빈약함을 엿보게 한다.
4.
'마법사 무림에 가다'는 참신한 글이었다. 그리고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 역시 아직은 신선한 글이다. 저자의 글솜씨가 늘어서 표현과 전개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매끄러워졌다.
전작인 '마법사 무림에 가다'만큼 큰 반향을 일으킬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시장에서 크게 활약할 것이 당연한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재미있는 글이다. 전작을 떼어놓고 그 자체만을 살피면 시점과 구조 이외에는 딱히 문제점을 찾기 힘들 정도의 수작이다. 아니, 사실상 시점과 구조의 문제는 한국의 퓨전 판타지의 대다수의 문제라 보는 것이 옳으니, 결국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를 훌륭하다 평가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와 '마법사 무림에 가다'를 떨어뜨려놓고 생각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전작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모르되, 이미 아는 이상은 의식하지 않을래야 그리 할 수 없다.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의 가장 큰 적은 전작이다. 이제 겨우 2권이 나온 시점에서 이리 평하기도 너무 이르나, 사실상 전작의 흔적을 얼마나 지우느냐, 전작의 영향을 얼마나 덜 받느냐에 따라 평이 갈릴 것이다.
덧붙여,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의 배경이 '마법사 무림에 가다'와 같았다면, 곧 '마법사 무림에 가다' 이후의 이야기였다면 차라리 나았으리라 여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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