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글비
작품명 : 금발의 정령사
출판사 : 중앙books
0.
<금발의 정령사>를 읽었다. 저자가 아마도 여성일 것이라 추측되는 플롯과 문체에서 의외로 산뜻함이 느껴졌다. 출판사가 중앙books라는 점도 손을 뻗는데 일조했다. 지난번에 21th 테크노 르네상스(왜 21C가 아니라 21th인 걸까...)가 꽤 인상깊었기에 출판사에 호감이 생긴 터다.
<금발의 정령사>는 가벼운 글이다. 더없이 가벼우나 방정맞지는 않다. 진중한 면이 없다는 것이 흠일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가벼움을 추구하는 글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하다.
다만 여류저자 특유의 플롯이 대중에게 통할지가 관건이라 하겠다.
1.
<금발의 정령사>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이야 물론 전혀 하자가 없다. 다만 여성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플롯은 약간 문제가 있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판타지의 상당수가 두 명 이상의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남주인공과 엮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 허다한 정도를 넘어 대중적이기까지 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아무리 대중적이다 못해 일반적인 수준이라 하더라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사실이며, 비판받아 마땅할 일이다.
이 비판의 대상에는 <금발의 정령사>도 들어간다. 다만 경우가 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2권까지 진행된 현재, 주인공인 지니에게 얽히는 남성 캐릭터가 벌써 셋이다. 이야기가 5권 이내에 완결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기에,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 또한 넘친다.
흔히 여성향 또는 역하렘이라고도 하는 부류다. 그리고 그 본질을 따지면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뀌었고 음흉함과는 거리가 멀다 뿐이지, 남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것과 거의 대칭을 이룬다.
물론 비판받을 일이긴 하나 옳지 못하다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다만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 신경썼으면 하는 바람이며,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를 더 깊이 있게 다루었으면 한다.
2.
<금발의 정령사>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건의 규모가 작고, 사건의 중심에 항상 주인공이 존재하며, 주인공의 감정과 소녀다운 시각에 맞추어 기술되고 있는 바, 저자가 <금발의 정령사>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저술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사용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주인공이 자신이 지각(知覺)한 것, 스스로 생각한 것 등을 서술하는 시점이다. 즉, 서술의 관점이 주인공의 내부에 있다. 따라서 외부의 시각으로 서술하는 것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사용법이 아니며, 오히려 3인칭이라 할 수 있다.
<금발의 정령사>는 이러한 시점의 활용에 미숙했다. 자신을 표현하는데 3인칭의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주인공 자신의 행위를 능동형이 아닌 수동형으로 표현하는 문제를 드러냈다. 또한 자신의 현재를 과거형으로 표현하거나 자신과 타인의 위치를 혼동하는(오다와 가다, 하다와 되다 등) 문제도 있다.
출판사의 편집부를 탓할 만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시점과 문장의 활용에 미숙하며, 그 점이 출간된 책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무릇 시점은 글의 재미를 자아낼 수 있는 요소이며 장치이기에, 이 점을 간과한 저자의 미숙함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금발의 정령사>는 퓨전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다. 주인공은 리얼 월드에서 17세까지 자랐으며, 사망이라는 절차를 걸쳐 판타지 월드에서 환생한 경우다.
그러나 <금발의 정령사>가 굳이 퓨전 판타지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0세의 주인공에게 27세의 정신연령을 부여하기 위해서일까? 주인공이 천재인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일까? 주인공의 캐릭터리티 디자인을 위한 것일까?
퓨전 판타지가 굳이 '퓨전(흔히 이계진입이라 일컫는)'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에는 리얼 월드와 판타지 월드 사이의 사회문화적 충돌이라는 형태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한 사회를 겪은 인물이 다른 사회에서 이전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 그것을 통해 발전 또는 성찰하는 것 외에 무슨 이유가 있어 퓨전이라는 형태를 취한단 말인가?
<금발의 정령사>는 퓨전 판타지여야 할 이유가 없다. 주인공은 판타지 월드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리얼 월드와 비교하지 않는다. 변화를 일으킬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사회문화적 충돌같은 건 발생하지 않는다.
<금발의 정령사>가 퓨전 판타지여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저자는 현실 세계의 평범한 여자 고교생이 판타지 월드에서 벌이는 활약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맹목적인 이유를 순수하다 해야 할지 불순하다 해야 할지, 남성인 본인이 평가하기가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 하나는 말할 수 있다. <금발의 정령사>는 소설적으로 퓨전 판타지를 표방할 이유가 없으며, 무리한 설정을 함으로써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를 범하였다.
4.
<금발의 정령사>를 재미있느냐고 물으면 재미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분명 주인공인 지니가 벌이는 아기자기하고 감수성에 의존적인 사건들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여성 독자라면 특히나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점이 많은 만큼이나 단점이 눈에 띄고, 소설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 점을 저자가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금발의 정령사>가 가진 단점의 상당수가 수정 가능한 것들이니만큼 점차 나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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