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HERO GAME
작가 : Pascal 작가님
출판사 : 문피아
1. 거장의 거창한 예술관
일단, 글이란 건 어떻게 쓰든, 작가의 마음대로겠죠. 마음대로 상상하고 마음대로 써내려 가도 사실, 문제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과연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느냐?’란 것을 언제든지 독자에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헤겔이 예술의 죽음을 선언했으며 그 이후 포스트 모던의 물결이 헤겔의 죽음을 떠들어댄지 3~40년은 족히 지나간 2015년의 문학계에선, 원숭이의 낙서와 인간의 예술 작품을 구별 지을 유일한 기준은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나 마르셀 뒤샹의 <샘>이 예술 작품으로서 평가되는 건, 당연히 그들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할 만한 미학적인 관점이 충분히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잭슨 플록은 물감 뿌리기로 사람들을 현혹한다지요. 물론 물감을 뿌리거나 흰 도화지에 검은 상자 하나 그려놓고 신의 절대성을 그려냈다고 우긴다던가, 변기를 가져다 놓고 예술이라 자랑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사람들에게 미학에 대한 강연을 시키면 아마도 몇 시간이라도 자신의 세상에 대해 정확하고 확신 있는 어조로 떠들어 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예술가들 보통 우리가 흔히 아는 ‘미술’도 잘 하긴 해요.)
2. 독자의 부당한 편견, 그리고 작가의 반격!
반면에 HERO GAME이 독자들에게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평가 받지 못 한 이유는, 아마도 그걸 알아보지 못한 독자들의 부당하기 짝이 없는 편견 때문일 겁니다!
진심으로 말하건데, 이 작품은 예술계의 혁명입니다. 한국 문학계를 뒤흔들 혜성의 출현입니다.
특히, 첫 부분에 자동항법 장치와 같은 지루한 세계관 설명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 제가 즐겨 보던 그 어떤 명작 소설에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장미의 이름에서도 초반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초반을 지루하게 했다고 하지만, 그거 죄다 사건이 일어나는 갈등 요인에 대한 배경이나 복선이 된다고요!
어휴, 우리가 거장이라 부르는 이들의 소설은 정말 지루했죠. 왜냐하면 뻔했거든요.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이 시사하는데로, 신선한 시도는 첫 시도 이외엔 죄다 의미가 없는 셈이죠.)
보르헤스 이후의 모든 남미류 환상 작품이 그렇게 다 지루하고 시시했기에 마르케스의 작품은 빛을 잃었고 움베르트 에코, 디킨즈, 러브크레프트, 도스토프예스키, 톨스토이 등조차 THE HERO를 쓰신 Pascal작가님의 혁명적인 시도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영도나 주제 사라마구는 물론이고 이문열도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저런 하찮고 비루한 작가들은 지루한 세계관을 설명할 땐 죄다 소설적 목적 하에 그런 재료들을 배치했거든요. 영국의 뒷거리에 대한 묘사나 구렁이 담넘어 가듯 현실성을 비튼 백년의 고독의 사건 전개 등은 죄다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의 맥락을 쌓기 위한 첫 번째 단추였단 말입니다.
하지만, Pascal님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동항법 자동차에 대한 당신의 묘사는 말 그대로, 그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나오기 때문에 필요했던 겁니다.
이건 정말로, 혁명적인 사고방식이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헤겔적 진리관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요, 소설의 요소들이 주제 의식에 봉사해야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가르침에 가장 극단적이며 현대적인 방법으로 ‘마무리 일격’을 꽂아 넣은 희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니 작가님의 미학에 대한 고견을 좀 듣고 싶군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대작을 써내려가셨는지... 작품의 결말이 어필하는 데로 그런 묘사들의 쓰임이 과연, 우리 무지몽매한 현대인들의 이성에 대한 맹신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함이었는지!
크흑. 작품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안되요. 안됩니다.
변기가 예술관에 작품으로 올라간지 70년이 지난 시대입니다. 요즘은 작품 너머의 설명이 필요한 시대이지요. 설명하지 않는다면, 원숭이 낙서로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단 말입니다.
게다가 꿈속에서 꿈을 꾸며 꿈과 경계가 흐릿하다는 그런 소재는 이제 너무 많이 울궈먹어서 고무 타이어 냄새가 난다고요. THE HERO의 참신한 작품 형식이 없었다면 정말 끔찍합니다.
3. 소장의 신랄한 똥통
또한 FBI에 대한 새로운 식견과 그 FBI 수사관이라는 주인공의 세계 해석 또한 그래요. 어른스러움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로 어린애 입맛을 든다던가, 여성이 어른스러운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다던가 하는 걸로 보아 2200년의 미래는 정말로 암울하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가 피흘려 이루어낸 남녀평등 정신은 무너졌고, 2200년대에도 민족에 대한 집착이 이어진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인간 정신의 발전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미래상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게다가 제임스의 상관도 굉장히 생각 없는 발언들을 마구 하고 다닙니다. 도저히 그 직급에 있는 인물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만큼요. 사람들이 2200년대에 이르면서 점점 원숭이가 되어간다는 것을 잘 지적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이 병치되어 전개되는 2030년대의 사람들도 원숭이 같이 떠들고 행동하는 것이 참 안타깝군요. 여성을 x집이라 표현하질 않나. 혹시 이러한 기준의 불명확성또한 작가님이 의도한 것일까요? 아니면 옥의 티일까요? 아니면...)
그리고 이 작품의 가장 잘 된 점은, 바로 그런 유치함을 작가 본인이 거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썼다고 추정해도 될 만큼, 잘 그려냈다는 겁니다. 잘 아는 사람이 일부로 유치함을 연기하기란 극도로 어렵습니다. 자신의 모든 자부심과 지식, 그것들이 생성하는 수많은 인과적 연결 고리들을 과감히 무시하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로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괜히 찰리 채플린이 위대하겠습니까?
인물들의 언행을 의도적으로 유치하게 표현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우민화 경향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수행하셨습니다.
이 작품의 문학성은 현실에 대한 투철한 투영의식으로 드러나는 작가의 저항 정신과 그런 최소한의 그럴듯함마저 철저히 해체하고 뚫어내어 유치한 인물을 완벽하게 그려낸 작가의 장인 정신입니다.
특히, 마리란 여성 파트너를 때내려 애쓰는 주인공의 행보를 보고 역시 무릎을 탁 치게 되었습니다. FBI 요원이란 직위에 뭐 대단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관에게 저 여자 마음에 안 든다 바꿔달라 떼쓰는 건 조금 너무 하잖아요? 게다가 그 상관은 그 얘길 직접 그 여자 파트너에게 대놓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여자 파트너씨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군요.
이런 걸 하마급 지능이라 한다면, 우아한 동물인 하마에 대한 모독이 될 거 같아요.
왜냐하면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에 문화도 문맥도 거의 고려되지 않았거든요. 동물들조차 자신들의 맥락 속에서 일정한 문화적 소통 형태를 잉태시켰지요. 하지만 THE HERO의 인물들은 전혀 인간적인 면모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요. 아니, 미국인들이 원래 저렇게 경우 없이 배설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다니는가요? 전 미국 가서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군요.
4. 비평 후기
사실 저 같으면 이런 대단한 소설을 절대로 쓰기 힘들 것 같습니다. 2030년인데도 형사들의 월급이 190만원이었죠. 짬 좀 되어 보이는 형사였고 또 24시간 근무면 시간 외 및 야외 수당이 꽤 될 텐데 190이라...
일단, 저라면 자동운전장치 자동차에 대한 8줄에 이르는 묘사글을 쓸 시간에 어째서 15년이 지났는데도 화폐 가치가 유지-아니, 190만원이면 매년 물가 상승률에 따라 상승하는 경찰공무원봉급표에 따르면 오히려 월급 삭감이군요-오히려 가치가 절상될 수 있었느냐에 대한 정치적, 경제학적 배경을 쌓기에 급급했을 테니까요.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도입부의 자동항법장치 자동차에 대한 묘사는 작가님의 신묘한 한 수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그덕에 모든 글을 정독하진 못 했습니다.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시작부분을 쭉 읽다가 5화부터 중간을 건너뛰어 결말부터 37화까지 거꾸로 봤어요. 중간 내용이 별로 연관이 없을 거 같았거든요. 포스트모던의 혁명적 글의 특성 상, 앞 내용과 중간 내용과 결말의 내용은 그다지 유기적일 필요가 없지요.
혹시 이런 제 태도가 부당하다 여겨지신다면, 처음에 자동항법 장치의 긴 묘사 같은 걸 쓰셔서 저 같은 독자를 설레게 만들면 안되는 겁니다. 원래 위대한 작품은 뒷부분만 읽든, 뒤에서부터 읽든, 중간 부분만 읽든, 어딜 읽든 대단하기 마련이거든요!
소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스포일하면 안 되겠지만, 굳이 감상을 말하자면요.
좀 놀랐습니다. 바로, 난폭한 '개연성의 스킵'에서 거장의 과감한 터치의 흔적을 보게 되었죠. 조금 더 정교하게 갈고 닦았다간 망할 뻔 했어요. 참으로 지금 상태에서 더 건드려선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오타도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제 맛이 살 거 같아요. 적절한 순간에 터지는 적절한 오타야 말로 정말 맛깔나는 최고의 한방입니다. 그게 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아주 잘 말해주거든요.
참고로, 이 모든 것은 Pascal님이 본인의 글을 포스터 모던적 실험 소설이라 가정했을 때 이루어진 비평입니다. 만약 HERO GAME이 진지한 문학 작품이었거나 혹은 낙서였다면, 제 비평은 비꼼이 되어버리겠죠. 그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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