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사람의 글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는군요.
제 경험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중학교 1학년, 그러니까 1993년에 처음 무협을 접했습니다.
당연히 영웅문으로 시작해서 김용님의 15작을 읽고, 와룡생을 좀 읽다가
타입이 안 맞아서 버리고, 양우생님의 소설을 좀 읽다가 다시 버리고,
용사팔황 시리즈에 반해서 운중악님의 소설을 찾다가 찾다가...
가짜 김용의 장백산맥을 찾고 혼자 기뻐 날뛰며 보다가 아닌걸 알고 짜증내고...
이 책들을 샀다는 걸 걸려서 부모님께 뒈지게 혼나고,
성적은 1학년 때 반에서 5등 안에 들다가
2학년 때 1, 2학기 4번의 시험을 모조리 다 반에서
27등이라는 고정적인 등수를 획득하기도 했었죠.
중3 때는 아직도 기억하는 금검지...
집에서 학교로 돌아오면서 12권짜리였던가요....통째로 빌려서
저녁먹고 읽기 시작해서 새벽 6시까지 읽다가
(그 때는 속독하는 법을 아직 몰랐었나 봅니다...지금은 3권 정도는 2시간이면 다 보는데...;;;)
아침에 다 못 읽은 걸 들고 학교로 가서 이어서 본 다음에 자다가 집으로 온 적도 있었죠.
그리고 그 때 구무협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고 서효원 님의 평균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다작...
대자객교, 실명대협 등이었나요....
그리고 박영창 님의 무림파천황 -_-
산으로 적들을 깔아뭉개 죽이는 허무맹랑한 장면에...진저리를 쳤던...
이 곳에 계시는 작가분들은 일부러 생략하겠습니다.
(특히나 금강님의 작품이야 제 개인적인 호오가 작품마다 워낙 뚜렷한 터라...)
구무협 읽다가 지쳐서 또 다시 무협소설을 찾아 헤매던 고등학교 시절...
그러다가 용대운님의 무영검 세로판을 발견하게 되었죠.
노란 색지에 오래되서 습기차서 서로 붙은 종이를 펴서 읽으면서도 그 재미에
홀라당 빠져들어가 눈을 비벼가며 정신없이 읽었죠.
그리고 마검패검, 탈명검...기억이 잘...하여튼 검 시리즈를 읽었죠.
용대운님 최초의 소설도 그 때 읽었구요...
그게 아마 야설록님 소설로 나왔었죠.
용대운님 소설인줄은 나중에 알았구요....
그리고 좌백님, 풍종호님, 운중행님, 진산님 등 2세대 신무협작가님들과 더불어
이재일님, 이우형님 등의 통신연재 작가분들이 등장하시게 되었죠.
무협소설을 매년 읽어서 거의 모든 소설들을 다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무협과 환타지가 같은 계보로 볼 수도 사실을 알게 되었죠.
드래곤 라자, 퓨쳐워커, 눈물을 흘리는 새의 이영도님이나 쿠베린의 이수영님은
엄청나게 뛰어난 환타지 작가 분이시죠.
읽을 가치가 있는 환타지만을 쓰십니다.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타지이죠.
환타지의 인기가 무협을 뛰어넘게 되었죠.
(여성독자 층의 엄청난 가세로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신무협 환타지가 총출동하더군요.
드래곤과 무림의 고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드래곤은 검강을 막아낼 수 있을까...?
타고난 전사 엘프와 삼화취정의 고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누구나 궁금해하고 상상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스토리 수준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죠.
대표적인 것이 비뢰도와 묵향입니다.
이제서야 최근의 무협소설들이 등장하네요.
비뢰도와 묵향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소설이자, 그 뒤를 이은 아류작으로
무협시장을 망쳐버린 원흉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독자들로 하여금 "무협소설"이 아니라 "무협지"를 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인 얘기를 잠깐 할까요.
소설이란 무엇입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간접경험을 체득케 하는 것이 첫째요, 그렇게 해서 독자의 지적능력을
향상케 하는 것이 둘째요, 그 간접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삶을 향해 살게 하는
것이 셋째요...너무 많겠지요? ^^;;
금강님의 소설은 민족론적인 색깔 속에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애를 느끼게 해주시죠.
용대운님의 소설은 불굴의 투지를 가진 인간의 저력, 끈질긴 인간의 생명력을...
좌백님의 소설은 자기 성찰적인 면을 자주 드러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재미에 치중한 소설을 쓰기도 하시죠. 무지하게 재미있죠.
풍종호님의 소설은 씹으면 씹을수록 곰씹는 맛이 드러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독자몰입의 소설이지요. (풍종호님의 지존록...5권 봐야 되는데...)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정신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책만 읽게 됩니다.
운중행님의 소설은 너무나도 재미있죠. 코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화로 코믹한 분위기를 유도하시는게 일품입니다.
이재일님의 쟁선계...역작과 수작.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각 작가분들의 일부 소설들에 해당하는 얘기이며, 다른 작가분들도 많지만 이하 생략...)
소설은 몰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만큼의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어떤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결심이든,
아니면 통쾌해서 가진 스트레스가 다 풀리든, 그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무협소설 역시 소설입니다.
가끔 무협소설은 흥미 소설이기 때문에 재밌으면 그만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데다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주기도 한다면 그것이 더 좋은 소설이겠죠.
용어로 비교를 하자면, 아까 말씀드렸던 무협지와 무협소설과의 차이점이겠지요.
다시 비뢰도로 돌아가면,
다시 묵향으로 돌아가면,
이 두 소설은 단순한 스토리만 쭈욱 나열하고 있습니다.
괴팍한 성격의 강자가 등장해서 적들을 쭈욱 물리칩니다.
이 단순명쾌한 스토리를 계속해서 풀어제끼죠.
그게 10권이 넘어갑니다.
진짜 환장합니다.
지겨워 미치겠죠.
보다가 포기하신 분들 많으시죠.
요새 나온 소설들이 대체로 다 저렇습니다.
비뢰도 초반에는 솔직히 재미있었습니다.
신선했죠.
저도 9권까지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10권부터 포기했었죠.
묵향 무협편...
통쾌한 무협스토리였습니다. 별로 길지도 않았죠.
신선하게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환타지편...지겨워 죽을 뻔 했습니다.
엽기 먼치킨 스토리의 대표적인 두 케이스죠.
저러한 소설의 특징은 빠른 전개입니다.
빠른 전개는 흥미도를 엄청나게 높일 수 있지만, 그 대신의 다른 것들...몰입도라든가,
독자의 상상력 여지라든가, 느끼는 점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싸그리 다 사라집니다.
급격하게 올라간 흥미도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질질 끌면 완결이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출판글을 쓰신 대부분의 작가분들은 알고 계시겠죠.
(모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틀림없이!)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아는 것을 적용해서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과는 별개입니다.
간혹 이런 논리들이 있습니다.
습작글이라도 출판이 된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무협소설에 매달릴테고,
그렇다면 언젠가 좋은 소설이 나오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길 기다린다면 언제나 무협소설은 현재의 정체에만 매달릴 것입니다.
무협소설은 수작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하지, 습작 수준의 소설들이 판쳐서는 안됩니다.
무협소설이 적게 나와 나오는 소설마다 최소한 대여점에 쫘악 깔리고,
그래서 무협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최소한의 생계 유지는 되고,
또한 적게 나오는 무협소설에 갈증을 느낀 독자들 중 평소 무협소설 습작을 꾸준히 해온
그래서 어느 정도 실력과 열정을 동시에 갖춘 기본 수준 이상의 작가가 글을 내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 고무림에 등장하는 신인작가 분들의 무협소설들을 보십시오.
대여점에 깔려있는 여러 무협소설들과 비교도 안되는 질을 자랑하고 있지요.
이러한 상당한 수준의 무협소설들이 빠른 전개의 스토리만 날려대는
무협지 때문에 뒤로 밀리고, 출판이 안되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까!!!
중, 고등학생 아해들, 흥미 위주 스토리 전개 무협지를 읽으면
확실히 공부에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무협소설 수능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무협소설 고 3 때까지 적어도 그 때 나온 모든 소설 거의 다 읽고도
책 빨로 서울 상위권 대학에 가볍게 갔습니다.
수준 있는 무협소설, 한국 현대문학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고작 26세인 저보다 훨씬 많은 무협소설을 봐오신 분들도 이렇게 많이 계신데,
객기라고 볼 수도 있는 이런 글을 겁없이 올려서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며칠 안 있으면 캐나다로 떠나서 무협소설을 한 동안 못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 분노의 여파로 볼 수도....-_-;;;)
비싼 돈 들여서 연수 가는 터라 무협소설 1년 끊고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라
고무림도 더 이상 못 들어오겠지요...
그 대신 갔다와서 좋아하는 작가분들의 소설을 최소한 한달 동안은 마음껏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쁘기도 합니다 ^^;;
넋두리성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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