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렇게 애잔한 여운과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 지금까지 몇 편이나 됐던가...
장경의 '암왕'은 나에게 무협소설로서는 드물게(감히 그렇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세포속의 전율을 짜릿하게 일깨워 준 작품이었다.
'암왕'의 스토리구조는 사실 뜯어보면 단편적이고 지극히 무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척마의 기치 아래 신음하는 배교의 시련과 교의 사수를 위해 힘겹게 검을 잡은 호교신장 명강량의 고군분투... 끝내 몰락해버린 배교... 교도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더 강한 무공을 찾아나서는 주인공,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게 된 절세 신공. 그리고 처절한 복수...
그러나 암왕을 읽고 난 뒤 이러한 단편적인 구조를 탓하는 독자가 없음은 바로 그 단조로운 스토리와 등장인물 하나 하나에 일필휘지로 생명을 불어넣고 독자들의 시선을 시종 사로잡게 만드는 작가 '장경'의 놀라운 능력 때문일 것이다.
본인만 해도 눈에 뻔히 보이는 기승전결에도 불구하고 '암왕'을 읽는 동안 시종 소설속으로 빨려들어가 등장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고 더불어 호흡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극히 무협소설같은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전혀 무협같지 않은... 그러한 힘이 이 소설속에 담겨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 가장 첫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애절한 러브스토리일 것이다.
강량과 악약의 지순한 사랑은 세상의 모든 연인이 꿈꾸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에 다름 아니다.
비록 입으로 사랑한다 말한적도 없고 스킨쉽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도 아니지만 독자들은 그들이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결실 맺기를 바라며 읽는 내내 가슴졸이고 그들이 좌절할때 함께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그 같은 가슴졸임이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재미와 감동으로 다가옴은 물론이다.
이 소설에는 그 밖에도 또 다른 애잔한 사랑이 있다. 단원청의 악약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고 강량이 그의 딸인 어린 성녀를 대하는 투박한 태도조차도 독자들에게 애절한 감동을 안겨준다.
- 몽환적인 분위기와 신화속의 한 장면인 듯한 정경이 독특한 감동을 준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느껴지는 성녀의 고결함과 신묘막측한 능력은 이미 이소설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꿈을 통한 예지력, 기문둔갑술, 기억 등을 제어하는 심혼술 등의 성스러운 능력에도 불구하고 강량에 대해서는 한없이 연약하기만 그녀의 존재, 그런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던져 지키려 하는 강량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로맨틱하다.
여기에 천상제, 주강의 꽃배, 비천쌍마 등의 몽환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독자들은 한편의 신화를 읽는 듯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빠져든다.
- 또한 등장인물들의 개성과 대사가 살아 숨쉬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성격이 개차반인 소면각저(笑面角猪) 팽해만, 그에 못지않은 교타방의 개망나니 마충현, 방황하는 청춘 화산의 장문천, 단순 무식한 산서명두 전우삼 등의 개성 묘사는 정말 일품이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도 "이 소설의 엑스트라는 없다"고 할 만큼 적절한게 그려지고 있어 소설의 리얼리티를 더해주고 있다.
또 상황과 분위기에 어긋남 없는 등장인물들의 잘 짜여진 대사 또한 읽는 재미를 톡톡히 안겨준다.
사실 굳이 문제점을 찾자고 한다면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 강량이 실종됐다가 재출도 한 것은 10여년에 불과하지만 재출도 후의 상황이 마치 수십년이 흐른것 처럼 혼동을 주는 부분(꼬마거지가 용두방주가 돼 있을 만큼)
- 강량이 중원을 피로 씻으려고 하는 이유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가장 큰 이유는 악약의 죽음일텐데 강량은 악약의 죽음을 직접 본것도 아니면서 너무 쉽게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또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 악약이 마치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것은 본인만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을 심어주다 알고보니 예령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는 부분에서의 허탈함.
- 곤륜, 화산, 무당파 등의 궤멸에도 불구하고 정파무림이 강량의 죽음만으로 칼을 쉽게 거둘 수 있을까 하는 의혹(절대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그럴수 밖에 없다면 굳이 강량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굳이' 찾고자 할 때 발견되는(그나마도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일 뿐 작품의 완성도에는 조금도 흠집 내지 못할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암왕'을 통해 장경이라는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된 안타까움이 반딧불이라면 아직도 읽어볼 그의 작품이 많다는 것은 마치 태양처럼 나에게 크나 큰 흥복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이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 강력히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by 하늘바람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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