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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깨어진 잔으로 건배하라

작성자
Personacon 별가別歌
작성
13.01.29 15:25
조회
3,130

모자란 퍼즐을 짜 맞춰라

  <깨어진 잔으로 건배하라>에 대하여


1

  개인적인 일로 매주 일정량의 문피아 연재작을 소수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이유 탓에 거리가 금방 동이 난다는 것이 문제였다. 출판 삭제를 한다든가, 연재 중단을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어느 날 불쑥 글 자체가 증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고로 새로운 글을 찾는 것은 이제 업무의 영역이 됐다. 나는 곧 고독한 연재방의 유령이다.


2

  유령은 제목을 본다. 일단 그게 중요하다. 눈에 띄는 제목을 찾아 들어간다. 그러나 유령은 또한 입맛이 까다롭다. 전반적으로 문법에 매우 민감하다.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 부호의 사용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 위해 연재분 가운데 하나를 임의로 선택하여 세밀히 살피는 작업은 필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합격점이다. 나무랄 데가 없다. 만족스럽다.


3

  시간의 힘은 위대하다. 그 앞에 만물은 삭거나 익는다. 이 둘의 차이는 관리다. 관리가 잘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잘 다룬 오래 된 물건과 같다. 허름하되 서린 세월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마치 장이 오래 묵을수록 특유의 맛을 품는 것처럼 이 글 역시 그렇다. 고유의 맛이 돋보인다. 우리는 흔히 이를 두고 필력이 있다, 고 말한다. 유령은 이에 만족한다.


4-1

  물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일전의 어떤 평자가 얘기한 바는 일견 타당하다. 확실히 많이 빈다. 배경적인 면이 약하다. 그렇다고 과할 필요는 없다. 시각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글쓴이 본인 입으로 얘기하지 않았던가? 너무 짙어 물을 뺀 상태라고. 지금처럼 글을 전반적으로 고친 상황에서라면 시각화는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섣불리 문장을 덧댔다간 망친 유화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옛 님도 그러셨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찬성한다. 차라리 조금 부족한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이런 말도 떠오른다. 긁어 부스럼이라. 그래도 정 허하다면, (배경과 관련해서) 그저 두어줄 더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4-2

  쓰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다. 첨언한다. 

  얼마 전 혹자가 이리 말한 적이 있다. 단순히 구구절절하다 해서 묘사가 좋은 게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보다 중요한 건 효과적인 연출이다. 굳이 누가 어찌 생겼는지 좔좔 얘기해 봐야 독자가 기억하는 건, 열에 한둘쯤에 불과하다.

  즉 그 인물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만이 머리에 남는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뼈대가 된다. 그 외 부차적 면모는 이 위에 덧붙는 살일 따름이다. 곧 핵심은 인물의 특징적인 면을 얼마나 잘 부각시키는가? 에 있는 셈이다. 시각화도 좋지만 글쓴이라면 먼저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부각법은 간단하다. 언행言行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인물의 생각은 곧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조금 더 크게 봐야 한다. 말이라 해서 꼭 입으로 내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라 해서 꼭 몸으로 움직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선, 얼굴색, 손짓 따위도 말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옷차림, 머리 모양 따위도 넓게는 움직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4-3

  무엇보다 찬성할 수 없는 건 인물에 관해서다. 그 평자는 생동감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의 인물은 모두 자기만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능구렁이 삼인방 - 파르잔 후작, 단테 황태자, 트왈레 - 조차 개개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그 지닌바 근본이 유사하여 동류의 인간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저마다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글 속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파르잔은 냉혹하다. 그는 한 눈에 상대를 평가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많은 귀족을 상대해온 특성 탓일 터다.) 곧 첫 인상에 많은 비중을 두는 위인이다. 그 결과 릴리는 ‘쓸 만한 예비 패’ 정도로 치부된다. 그래서 미행을 붙이지만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단테는 영악하다. 그의 어린 나이는 한편으로는 득이지만 또한 위협이다. (아마 삐끗하는 순간 허수아비 황태자로 전락할지도 모를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는 신중하게 상대를 판단하며, 이를 위해 서슴없이 제 어린 나이를 이용한다. 에이, 설마 제가요? 라는 식이다.

  트왈레는 짓궂다. 그는 못된 벗이다. 그는 제 이득을 위해 릴리를 이용한다. 근데 거절할 수가 없다. 첫째는 친구라는 명분 탓이고, 둘째는 결과적으로 릴리도 얻는 게 있는 탓이다. 곧 죽도록 고생하면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시련의 구렁텅이로 친구를 밀어 넣길 주저하지 않는 아주 얄밉고 성가시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고로 이토록 뚜렷한 특징을 지닌 인물들이 생동감이 없다는 건,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유령이 본 <깨어진 잔으로 건배하라>는, 인물만큼은 단단한 글이다. 잘 구축된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다. 그렇기에 다소 아귀가 맞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이 흔들림은 오직 연출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5

  사실, 비는 곳은 또 있다. 배경뿐만 아니라 서술 역시 그렇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성긴 편이다. 따라서 보는 입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심지어 이에 대해, 혹자는 작가의 역량 부족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를 의도적인 것, 즉 연출된 것이라 생각한다. 잘라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쳐내진 부분도 있을 테지만, 대개는 의도된 결과로 보인다.

  이를 테면 이 글은 ‘퍼즐’과 같은 셈이다. 그래, 이 서평의 제목이 저 꼴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종일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글쓴이가 놓고 간 조각을 받아 판을 채우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그런데 문제는 이 조각이 완전치 않다는 것이다. 핵심 조각은 있는데, 잘은 것이 통 나오질 않는다. 결국 짐작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 전체 그림을 계속해서 유추하고, 수정하며 핵심 조각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관은 이뿐이 아니다. 갈수록 판마저 커지니 각 조각의 거리가 수시로 변하고, 때론 위치마저 달라진다.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그래서 다음이 궁금하다.

  다음 조각에 목마르게 된다.


  



Comment ' 11

  • 작성자
    Lv.12 리체르카
    작성일
    13.01.29 16:35
    No. 1

    마지막 챕터에 접어 든 상황입니다. 나머지 조각들이 부디 독자님들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이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이제 뿌려놓았던 것 중 무엇이 함정이고 무엇이 진짜였는지를 밝혀나가는 최종장입니다. 제가 많이 부족한지라 어떻게 받아들이실련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가는 중입니다. 비평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별가別歌
    작성일
    13.01.29 16:43
    No. 2

    이런, 수정하는 사이에 댓글이! :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2 리체르카
    작성일
    13.01.29 17:03
    No. 3

    아, 연재분은 아직 중간을 좀 지나왔고 현재 초고를 쓰는 쪽이 마지막 챕터라는 이야기인데 와전되게 들릴 것 같아서 덧붙여봅니다. 총 8챕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별가別歌
    작성일
    13.01.29 17:05
    No. 4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았다는 것에 저는 그저 기쁠 뿐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작은불꽃
    작성일
    13.01.29 20:13
    No. 5

    멋진 비평이네요.
    주화입마되었다가 기연을 얻은?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8 이장원
    작성일
    13.01.29 20:59
    No. 6

    잘 만든 인물들임은 틀림없지만 제가 보기엔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는 NPC같더군요. 사소한 언행 하나까지 작가의 계산대로랄까, 그런 느낌이 든 게 생동감 없다는 평을 들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게 흠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조한 문체, 간결한 묘사와 더불어서 이 작품 고유의 맛을 더해주고 있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별가別歌
    작성일
    13.01.29 21:06
    No. 7

    음, 사소한 언행 하나까지 계산되지 않은 글이라는 게 저는 어째 상상이 되질 않네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강춘봉
    작성일
    13.01.29 22:42
    No. 8

    이장원님의 말씀은 그것인것 같습니다.
    가끔 작가가 글을 쓸때 놀라는 것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작가의 의도에
    벗어나 스스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때 글을 보면 캐릭터 마다 정말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그게 어떤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일이 일어나긴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작은불꽃
    작성일
    13.01.30 14:05
    No. 9

    우연속의 요행이군요.
    일어나긴 하지만 추구해서는 안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8 이장원
    작성일
    13.01.30 16:14
    No. 10

    강춘봉님 말씀처럼 가끔 그런 캐릭터가 있습니다. 작가가 특성을 부여하고 배경을 만들어주면 그때부터는 지가 알아서 행동하지요. 작가는 손가락만 움직이고요. 작은불꽃님 말씀처럼 요행일 수도 있지만 저는 작법의 하나라고 봅니다. 배경과 특성을 설정해두었기 때문에 큰 틀을 벗어나서 작품을 망치지는 않거든요.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주님 안에서 자유로운 상태랄까요.
    어디서 주워들은 거라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양과가 답답하다고 독자들이 뭐라고 하니까 김용이 대답하기를 얘 성격이 원래 이래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당연히 작가가 설정을 지킨 거겠지만 작중 인물이 그렇게 움직인 예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필력이 부족한 작가가 이러다가 캐릭터를 컨트롤 못하고 폭주해서 작품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설정이 부실하거나 그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작가의 사감이 들어가서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작가 입맛대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서 집필 중에 특정 인물을 특히 더 편애하거나 괴롭히는 경우가 있지요. 이럴 때 독자도 그 감정에 몰입해서 보면 생동감이 더해지기는 하는데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에는 결코 이롭지 않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티그리드
    작성일
    13.02.01 00:50
    No. 11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는 건 작가로서 엄청난 행운입니다. ㅇㅂㅇ 굉장히 좋은 일이기도 하고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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